“천하를 천하에 감추어라!(藏天下於天下)”

어렸을 적 학교나 교회에서 소풍 때마다 단골로 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보물찾기’였다. 선생님이 우리 모르게 곳곳에 보물쪽지를 숨겨두면, 우리는 하나라도 더 찾으려고 수풀 사이며, 돌무더기며 이리저리 찾아 다녔는데 찾는 것을 워낙 못하는 나는 쪽지를 많이 찾아서 푸짐한 상품을 받은 친구들을 늘 부러워하곤 하였다.

얼마전 중국 고전 ‘회남자(淮南子)’라는 책을 읽다가 눈길이 머문 구절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藏舟於壑 藏山於泽 人谓之固矣 虽然夜半有力者负而趋 寐者不知 犹有所遁。
若藏天下於天下 则无所遁其形矣。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산을 연못에 숨긴다면, 사람들은 확실한 방법이라 하겠지만, 한 밤중에 힘센 사람이 가지고 달아나 버리면, 잠든 자는 알지 못하나니, 이는 아직도 여전히 감춰둘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천하를 천하에 숨긴다면, 그야말로 더 이상 그것을 가지고 달아날 데가 없지 않겠는가!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이 생각났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 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라!(藏天下於天下)”
참으로 멋드러진 표현이다. 재물의 규모가 천하라니 이것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말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재물이니 이것을 담을 데가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니 그에 걸맞는 천하에 담을 수 밖에. 회남자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는 성경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땅은 유한함을, 하늘은 무한함을 상징한다. 재물이 유한한 데에 있으면 눈에 띄게 되고 결국 상대방의 표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재물이 무한한 데에 있으면 그것은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상대방이 알 수가 없다. 마치 수학에서 무한에서 유한을 더하거나 빼도 무한인 것과 마찬가지 원리와도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현실생활에서 그나마 어렵게 갖게 된 재물을 어떻게 잃지 않고 천하에 또는 하늘에 감추어 둘 수 있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한다. 자식은 이런 부모의 사랑 속에서 해맑게 성장한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이와 같다. 하느님은 내가 해맑게 자랄 수 있도록 내 안에 당신의 DNA-하느님의 모상(Image of God)-이라는 보물을 심어 주셨다. 또한 이 세상 안에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보물을 숨겨 두셨다. 나는 살면서 이러한 ‘보물찾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고 찾는 것은 바로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 이러한 여정을 통하여 나는 보물 몇개 찾아 움켜쥐고 잃어버릴까 근심걱정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보물 그 자체인 이 세상과 나를 향유하고 즐기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제 나의 삶은 보물을 움켜쥐기 위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보물, 이 세상에 숨겨두신 보물은 내가 쓰고 또 써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무한히 생성하는 풍요로움이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이것을 찾는 방법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Finding God in All Things)”

그렇다! 천하를 찾는 것은 천하의 근거인 신을 찾는 것이며, 천하에 숨긴다는 것은 그 근원인 신에 귀의하는 것이다. 모든 유한한 재물은 수명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야기하지만, 무한한 재물은 영원하기에 자유를 가져다 준다.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얻는 일용한 양식과 성취하는 일들, 재물들이 설사 때때로 우리 맘대로 잘 되지 않고 심지어 손해보는 때가 있어도 크게 낙담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말자. 내가 갖고 있는 재물이 적게는 창고에 숨겨둔 물건에서부터 많게는 계곡에 숨겨둔 배, 심지어는 연못에 숨겨둔 산일 정도로 크다 할지라도 내가 좌절과 절망에 빠져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아직 천하라는 보물을 찾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니 다시 한번 희망을 갖고 하늘을 바라보고 천하를 둘러보자.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보물은 너무도 커서 아직 보여지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천하의 보물을 보고, 향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 보자. 하느님은 어쩌면 내가 간구하기도 전에 이미 내 옆에 와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른다.

사진1) 중국과 11개 나라의 직업교육에 대한 연구서 “中外職業技術敎育”(1329쪽) 중, 제6장 ‘한국의 직업기술교육’집필, 천진대학출판사, 2011년11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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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동료교수와 공동으로 한국어전공 대학생을 위한 교재 “비지니스 한국어 번역”(140쪽) 집필, 대외경제무역대학출판사, 2012년10월 출판

중국에서 드리는 설 인사

어렸을 적 해마다 입춘이 되면 제 부친께서 대문에 ‘立春大吉 建陽大慶’이라고 써 붙이셨습니다. 제 딸 에스더가 붓글씨를 배워서 써왔다고 대문에 붙이지고 하니, 옛 추억이 생각나네요.

중국에도 입춘때 우리네 풍습처럼 글을 써 붙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설날이라고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춘절(春節)이라고 부릅니다. 봄을 맞는 축제라는 뜻이지요. 우리의 신앙절기에서 사순절을 Lent라고 하는데 이 뜻이 봄과 관련이 있듯이, 겨울의 추위를 참으면서 따뜻한 봄을 간절히 기다리는 심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공통된 바램인 것 같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봄날을 기다라는 춘절과 Lent도 주님의 부활이 오는 참된 봄으로 완성됨을 믿고 희망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새해에도 충만하시길……

龙去神威在 용해는 갔으나 신령한 기운은 남아있네.

蛇来春意浓 뱀해가 오나니 봄 기운이 완연하네.

깨달음과 義化 vs 保任과 聖化

몇년전부터 한국 기독교계에서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가 화자되고 있습니다. 대한 성공회도 또한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영성에 관련된 여러가지 훈련, 교육, 기도, 세미나 등등 여러가지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른바 ‘전통’을 타파하고 ‘성서’를 유일한 기치로 내걸었던 개신교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그동안 등안시했던 영성’전통’에 대한 탐구와 배움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원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영성과 신학은 서로 한몸처럼 붙어있는 知와 行이었던 것인데 이단에 대한 대처, 교회권력 싸움 등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신학을 강조하다보니, 신학(知)과 영성(行)이 점차 분리되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영성적 실천이 결핍된 지나친 신학적 사변에 대한 몰입은 서로를 갈라놓고 오해하고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이념화된 파편들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최근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전통이 서구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우리가 영성을 언급할 때 서양의 개념들을 통해 받아들이지만, 동아시아 ‘맥락(sitz im Leben)’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겐 동양의 전통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영성수련에 있어서도 동양과 서양의 전통을 함께 익힌다는 것은 저에게 보다 깊은 이해와 보다 넓은 실천의 폭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나눠볼까 합니다:

그리스도 영성전통에서는 크게 두가지 큰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화(justification)’이고 또 하나는 ‘성화(deification)’입니다. 전자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대한 주도권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이 크리스챤을 잡으러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은총의 힘으로 회심한 사건이 대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자는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데, 기도와 자선, 봉사 등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이 점차 하느님을 닮아가는 完德의 길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기에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주장해서 개신교에선 의화를 강조하고, 천주교에선 성화를 강조했지만, 오늘날 이 두가지 길을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역사에서 아씨시의 프란시스,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같은 영성의 대가들의 삶을 보면, 하느님을 강하게 체험한 ‘의화’도 있지만, 이를 깊이 간직하고 자신의 삶 안에서 꾸준히 펼쳐 나간 ‘성화’도 있었습니다.

서양 그리스도교 전통에 ‘의화’와 ‘성화’라는 개념이 있다면 동양에는 ‘깨달음(覺)’과 ‘보임(保任)’이란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본래의 나 – 유가에선 이를 理, 불가에선 性-인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보임이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 견성하여 참된 자아, 참된 도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참된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나가는 생활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동양의 전통에선 깨달음보다도 깨달은 후인 ‘보임’을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득이수난(得易守难)-얻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는 말이 생겨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보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유가에선 이를 ‘거경궁리(居敬窮理)’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즉 학문과 수양이 필요한데 그것은 마음을 맑게하고 정신통일하는 경지로까지 유지하는 ‘거경’과 사물-인간의 참된 본성을 포함-의 궁극적인 근거인 ‘리’를 밝히는 ‘궁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학자적인 몸가짐과 학문태도는 송나라의 주자학과 이를 받아들인 조선의 선비들, 그리고 주자학을 심화시킨 퇴계의 사상을 수용한 일본의 학자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우리 동아시아인의 영성전통인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참으로 놀랄만한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 여러가지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급속하게 빠른 성장과정 중 일부 부정적이고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년전부터 개신교계에서 일고 있는 ‘영성’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성장일변도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내실을 기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영성, 특히 ‘깨달음’ 혹은 ‘의화’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자칫 또하나의 독단을 낳을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과거 일부 교회에서 성령체험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령체험을 한 신자들이 영적교만에 빠져서 교회에 분란을 가져왔던 일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이를 보존하고 꾸준히 심화시켜 나가는 ‘보임’ 혹은 ‘성화’의 훈련도 그 못지않게 값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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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 올 겨울 이곳 천진에도 예년과 달리 눈이 자주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습니다. 집 앞에 공터 갈대밭에 내린 설경을 보고 있자니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퇴계 이황의 ‘산거(山居)’라는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조상들의 그림과 시를 대신해 저의 마음을 표현해 봅니다.

莫道山居无一事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

平生志愿更难量  내 평생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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