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만난 사람들(20160619 강동교회)

ugc[5]다해 연중12주일

(열왕상 19:1-16; 갈라3:23-29; 루가 8:26-39)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 엘리야, 불결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 이야기

 

혹시 여러분 중에 ‘검은 사제들’이란 영화를 보신 분 있으신가요? 이 영화는 작년에 개봉한 국산영화인데, 헐리웃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예수회 사제가 악령을 퇴치하는 것처럼 ‘검은 사제들’도 퇴마사제(김윤석)와 그를 보좌하는 부제(강동원)가 등장합니다. 영화 앞 장면에 정동 주교좌성당 내부가 나오기도 하고, 명동성당, 혜화동 가톨릭 대학도 나오는 등 저한테는 꽤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께서 악령들에게 돼지 떼로 들어가길 허락하시니 돼지들이 호수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대목을 들으면서 저는 ‘검은사제들’ 영화에서 본 이와 유사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퇴마사제가 여자에게서 악령을 빼내어 돼지에게 넣은 다음에 부제는 악령에 사로잡힌 돼지를 한강에 빠뜨리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뛰어갑니다. 그래픽처리가 되었겠지만, 흰 돼지가 악령에 사로잡히자 검은돼지로 변하면서 돼지의 눈빛이며 행동이 배우 못지않은 일품연기였습니다. 약간 코믹스럽지만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야기하다보니 돼지 이야기를 했네요. 어찌되었든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돼지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구약과 복음에 등장한 두 사람, 엘리야와 불결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 중 한 사람이요, 다른 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을 만났다는 큰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이후의 두 사람에게서 큰 변화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만나기 전 두 사람의 상황에 대해서 봅시다.

엘리야 예언자의 경우, 왕비 이세벨로부터 살해협박을 받고 도망치는 신세였습니다. 쫓기고 쫓겨서 거친 들판 바싹 마른 싸리나무 덤불가로 몰린 엘리야 예언자는 완전히 탈진상태에 빠져서 야훼께 자신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하소연합니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열왕상 19:4) 쓰러진 주님의 제단을 다시 세우겠다며 분연히 일어났던 그의 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친 육신에 영혼까지도 자기비하의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빵과 물을 주며 격려해 주었지만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엘리야를 당신과 결정적으로 만나야 되는 운명과도 같은 장소, 호렙산까지 한걸음 한걸음 힘들게 인도해 주십니다.

한편, 불결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봅시다. 그는 수많은 더러운 영들에 시달려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옷을 찢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몸도 자학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었지만, 엄청난 힘으로 부숴버리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통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추방되어 죽은 이들이 거하는 무덤을 배회하며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끝없이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죽임을 당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제 이들은 하느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열왕상 8:9) 하느님은 우리가 자신을 진정으로 찾을 수 있도록 말을 거십니다. 그분은 미리 답을 정해놓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기를 찾을 수 있도록 ‘물음’으로 오십니다.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루가 8:30) 그런데 만일 우리가 평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았다면 엘리야 예언자처럼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래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불결한 영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정체성이 아닌 내 안에 들어와 주인행세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타인들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군대”라고 대답한 사람은 사실 자신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영성수련에 있어서 심지어 평범한 일상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막상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생각, 진정한 열망, 바램이 아닌 내 것이 아닌 남의 생각, 남들의 바램을 가지고 주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럴 경우, 우리의 정신도 ‘군대’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일정정도 분열되고 소외되어 있어서 하느님과 만남이 어렵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주인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주인이 되어 있다면 하느님과 대면했을 때, 엘리야 예언자처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없고, 악령 들린 사람처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루가8:28) 소리지르며 도망치려고 할 것입니다.

‘군대’라는 수많은 불결한 영들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접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에서도 과거와 달리 발달된 과학문명 덕분에 갖가지 좋은 말씀을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에서 충분히 소화되어 자신의 것으로 체화되지 못한다면 내 입으로 말하지만 실은 내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종교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각종 편견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테러와 폭력으로 희생되는 것이 어쩌면 우리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는 ‘군대’라는 악한 생각들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기 때문에 참된 나, 참된 우리, 참된 인류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러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단계, 하느님을 만난 다음입니다.

하느님을 만난 다음 우리에게 오는 가장 큰 변화는 기쁨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나온 구절처럼 우리는 “나를 구해 주신 분, 나의 하느님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시편42:11)라고 기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곤경에서 빼내주시고 내가 온전히 나다울 수 있게 하셨기에 우리는 크나큰 기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기쁨에 우리는 저절로 주님께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됩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다시 우리를 보내십니다. 엘리야 예언자에게 무너진 왕국을 다시 세우고, 대가 끊길 위기에 놓인 예언자를 이을 사명을 주십니다. 사실,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만나서 변화되었지만, 주변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이세벨 왕후는 여전히 살기등등해 있고, 예언자는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체험했고,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강풍, 불길, 지진에도 사라지지 않고 부드러운 그의 마음 한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드러움, 하느님의 약하심이 세상의 포악함, 세상의 강함을 이긴다는 깨달음을 얻었기에 한층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복음에서 악령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약간 상황이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소외시키고 주인 행세하던 수많은 영들을 내쫓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또다시 예수께 매달립니다. 성경은 그가 “예수를 따라다니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하느님께서 너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일을 이야기하여라.”(루가 8:39)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그가 아직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정신적인 노예상태에 있었던 그 사람은 아직도 여전히 뭔가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습성까진 떨쳐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설사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한 자기자신이 아니면 그것은 또 하나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는 진리를 자신에게로, 자신들의 종교로만 묶어두려는데 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온전히 자유로울 때만이 인간은 하느님과 진정으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자유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다울 때 자유는 온전히 발현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자기 발로 걸어가서 너가 원래 살던 사람들, 너를 쫓아냈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서 네가 이제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언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매장되어 사회적 사형을 당했던 사람에게 주님은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주심으로써 자유와 생명을 되찾아 주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예배에서 우리는 예언자 엘리야와 불결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주님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했는지, 또한 주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시선을 우리자신과 우리 공동체, 그리고 우리나라로 돌려봅시다. 지금 우리 각자는 어떤 상황인가요? 주님을 만나기 전 곤경에 빠진 상태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시편저자의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도해 봅시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시편 42: 1-2)

또 만일 여러분이 현재 어려운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이 주님께 하소연해 보면 어떨까요?: “나의 반석이시던 하느님께 아뢰옵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사옵니까? 이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나날을 보내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이옵니까?”(시편 42: 9)

그러면 주님께선 아마도 엘리야 예언자에게 했던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의 지친 심령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악령들린 사람에게 하셨듯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주인행세하고 있는 것들을 몰아내 주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행복하시다면, 다음과 같이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야훼의 사랑 낮에 내리시면 밤에는 이 입술로 찬양을 올리리이다. 이 몸 살려주시는 하느님께 기도 드리리이다.”(시편 42: 8)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