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다해 연중21주일)

woman[1]

다해 연중 21주일(루가13:10-17)

 사랑: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

 

교우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올해 여름 날씨가 유달리 무더운 것 같습니다. 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 병으로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쳐주셨다가 회당장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예전에 어느 교우분과 대화한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분은 오래된 성공회 신앙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북에서 성공회 교회를 다니셨다고 합니다. 해방과 전쟁으로 가족이 남한에 내려와서 그분의 아버님은 성공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님은 별세하셨는데 장례미사가 공교롭게도 주일이었습니다. 당시 관할사제께서는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니, 교회에서 장례미사를 할 수 없다고 하셨고 이에 유가족은 큰 실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분은 그 때 받은 마음의 상처로 냉담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유대교의 안식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쉬신 날을 기념하여 사람들도 힘든 노동에서 잠시 벗어나 쉬라는 좋은 취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인 이사야서에는 안식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거룩한 날에 돈벌이하느라고 안식일을 짓밟지 마라. 안식일은 ‘기쁜 날’ 야훼께 바친 날은 ‘귀한 날’이라 불러라. 그 날을 존중하여 여행도 하지 말고 돈벌이도 말고 상담 같은 것도 하지 마라.(이사 58:13)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주일날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기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는 잠시 노동의 수고로움,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우리를 노동의 고단함에서 해방시키는 날이여, 주일은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금지의 날로 되어버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안식’이라는 말, ‘부활’이라는 말 자체에 고정된 나머지 원래의 취지를 망각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에는 쉬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모든 활동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금지를 하게 한 것입니다. 또한 주일은 죽음에서 부활한 날이기 때문에 죽음과 관련된 예식을 하면 안된다는 경직된 사고방식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날수록 관습이 되고, 법률이 돼서 우리를 속박하는 억압기제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고정관념이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을 얼마나 억압하고 있고, 동시에 그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냉혹해 질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져서 고통받고 있던 여인을 고쳐주시자, 사람들이 함께 축하해주기는커녕 모두들 분개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항의합니다: “일할 날이 일주일에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병을 고쳐달라 하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루가 13: 14)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시며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평일에 고쳐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공교롭게도 안식일에 고쳐주실 때도 있습니다. 만일 사람들 말처럼 안식일에 안된다고 하면 환자입장에선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그 환자가 거동도 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상태라면 예수께서 다른 곳으로 가시면 어떻게 거기까지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화를 낸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었을 건데, 안식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병든 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입니다. 아니, 알고도 일부러 외면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겐 동정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관습과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법이 사실 본래의 정신을 망각해 버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는 오늘 복음 마지막에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반대하던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 하여 이 여자를 사탄의 사슬에서 풀어주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루가 13: 15-16)

예수님의 이 말씀에 군중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군중은 안식일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말 못할 고통을 받고 있었기에,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하느님의 뜻이자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상기시키신 그 말씀에 크게 고무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처럼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 편견,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억압과 속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하느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지 허리 ‘굽은’ 여인의 몸을 낫게 하신 것뿐만 아니라 고정관념 속에 갇혀있던 사람들의 ‘굽은’ 정신도 풀어주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간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거나 고정불변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무한하신 하느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나 우리가 만든 모든 제도, 관념, 규칙을 절대화하면 안됩니다. 설사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불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항상 보완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불안해서 어떻게 사나요? 뭔가 고정적인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뭔가 고정적인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고정관념과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사랑을 너무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읽으며 저의 설교를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2.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7.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8.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9.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10.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12.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13.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