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아이콘, 하느님의 성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요한5:31-47)

IMG_0117가해 사순4주간 목요일(30일)

출애32:7-14 / 시편106:20-25 / 요한 5:31-47

PC라고 부르는 퍼스널 컴퓨터는 초기에 DOS라는 영어 명령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콘(Icon)’이라는 그래픽을 통해서 보다 직관적이고 쉬운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용자는 아이콘을 클릭해서 새로운 창을 열어서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아이콘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아주 익숙한 용어입니다. 흔히 ‘이콘성화’라고도 불리는 아이콘은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여러 성인의 모습을 그린 성미술로서 정교회의 대표적인 종교 미술입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우리 성공회와 천주교가 이콘성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울 주교좌 성당 제단 뒤에 있는 성화도 이콘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콘성화는 마치 유리창과 같아서 초월자이신 하느님이 이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당신 모습을 비추어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콘이라는 그림창을 마주하고 이 세상에는 우리 인간이, 그림 창 저 편에는 하느님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콘미술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로 ‘聖事(Sacrament)’입니다.

성사란 좁게 보면 세례나 성체와 같은 몇가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전례적 행위를 통해 보이지 않으신 하느님의 신비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이러한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신비’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모습을 본 일도 없다…….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 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요한 5:37, 39)

이 말씀은 예수님이야말로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분, 다시 말해 하느님의 아이콘이자 성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이라는 구체적인 역사 안에 사셨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기쁜 소식을 들었으며, 그 사역을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아무리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보이셨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이라는 아이콘을 클릭해서 초월과 구원이라는 새로운 창을 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성사로서 우리 삶 안에 들어오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먹고 마시는 식사, 새로운 사람을 맞아들이는 환대,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 심지어 죽음과 같은 우리의 모든 삶도 그저 그런 무의미한 일상의 연속 내지 이벤트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닫힌 마음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지만 너희는 나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요한5:43)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이 우리의 일상은 그렇고 그런 차원이 아닌 거룩한 성사가 될 수 있으며, 마침내 예수님의 아이콘은 우리가 영원하신 하느님으로 건너갈 수 있는 구원의 창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 세상의 신비를 미리 맛보고, 초월을 미리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이제 고난주일을 얼마 남겨두고 있질 않습니다. 해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상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총의 도우심으로 닫힌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한다면, 예수께서는 이 예식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의 삶과 신앙에 새로운 창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이콘이시며 모든 성사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간절한 믿음(요한4:43-54)

untitled가해 사순 4주간 월요일

(이사65:17-21 / 시편30:1-5, 8, 11-12 / 요한4:43-54)

여러분은 상대방이 하는 말만으로도 믿습니까, 아니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믿습니까? 아마도 저를 포함한 여기 있는 대부분 사람들은 前者가 아닌 後者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보고서 믿는 것보다 들어서 믿는 것이 더 성숙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20:29 참조)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차원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고향인 갈릴래아로 왔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야기의 배경장소인 가나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그 첫 기적이란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성서는 제자들이 포도주의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 2:11 참조)

이처럼 보고서 믿는 것은 제자들이나 갈릴래아 고향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종교예식을 지키기 위하여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봤던 고향사람들은 그제서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일행이 고향에 도착하시자 환영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봤던 뭔가 신기한 일이나 기적들을 이 곳에서도 보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적 절박감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변화를 갈망하기 보다는 그저 새롭고 놀라운 뭔 가에 흥미와 기대를 가질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이제 실존적 간절함을 가지고 한 사람이 예수님께 옵니다. 그는 그 지방 고위관리였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이 고관이 이스라엘 사람인지 이방인인지 언급하고 있질 않으나, 다른 복음서에는 이방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건 이방인이건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고관이 매우 급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다 죽게 되자 예수님을 어서 모시고가서 아들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애원합니다: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주십시오.”(요한 4:49)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가시질 않고 “집에 돌아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하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성서는 이 순간을 너무도 간단히 증언하는 바람에 우리는 고관의 내면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의 마음은 실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와 다른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당황스러움, 그 분의 말만 믿고 과연 돌아가도 좋은 건지 하는 의심,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는가 하는 체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 말씀을 믿고 따라가 보자 하는 마음 등등.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마중 나온 종들로부터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시간을 물어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기적은 그가 말씀을 들은 바로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그 들음은 그저 그의 귀에 들린 소리나 음성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서 받아들인 ‘들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외형적으로 돋보이는 신기한 기적은 신앙의 참된 동기가 될 수 없으며,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만이 신앙의 참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갈릴래아 가나에서 예수님과 만난 고관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신앙의 참된 가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시대 사람처럼 그 분을 물리적으로 볼 수도 없고, 기적을 직접 목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서의 말씀과 믿음의 조상들이 전해 준 증언을 듣고 믿을 뿐입니다. 보는 믿음보다 듣는 믿음이 더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수시대 사람들처럼 뭔가 신기한 기적이나 이적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뭔가를 보고서야 믿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 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좀 더 높은 우리의 태도를 요구하지만, 사실 보고서 믿거나 혹은 들어서 믿거나 모두 우리를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아무리 좋은 것을 들어도 오늘 들은 고관처럼 간절함이 있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그 간절함이란 바로 우리의 태도이며 지향입니다. 내가 참으로 변화되길 갈망하고, 나의 실존적 간절함이 담겨있지 않으면, 아무리 기적이나 신기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참으로 변화시켜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해 달라고 간청한 고관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속한 곳이 다시 새로워 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참다운 단식(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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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58:1-9 / 시편 51:1-4, 16-18 / 마태 9:14-15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단식은 경건의 상징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18장 12절에 보면 성전에서 바리사이파 사람이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칩니다”라며 기도한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 이유는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다고 여기는 목요일과 율법을 받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여기는 월요일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율법은 유대력으로 7월 10일, 즉 속죄일에만 단식하라고 하였습니다. 레위기 23장 27절은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하고 있습니다: “칠월 십 일은 죄 벗는 날이다. 그 날에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단식하며 야훼께 제물을 살라 바쳐야 한다.” 그러던 것이 바빌론 포로 이후에는 1년에 4번-4월, 5월, 7월, 10월-이나 단식하는 날이 생겼고(즈가리야 8:19 참조), 그 후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이 정한 것보다 횟수를 늘려 자주 단식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경건하고 열심한 사람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기득권을 계속해서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출애굽을 통해 해방의 기쁨을 기억하고 사람들을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단식이 세월이 흐르면서 경건함과 불경함을 판단하고, 차별과 특권을 가져오는 ‘전통’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보여주기 식 단식을 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보아 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 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이사 58:3)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 모두는 곡기를 끊는 단식(斷食)이라는 결핍된 행위를 통해, 이보다 더 큰 하느님의 보상이나 응답을 원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적어도 사람들로부터 경건하고 열심하다는 보상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닌가요?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말 속에 이러한 우리 내면에 잠재된 보상심리가 은연 중에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참다운 단식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참다운 단식의 내적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 앞에서 내 실존이 죄인이라는 처절한 자각입니다. 시편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이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 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시편 51:3-4)

그렇습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느님 면전에서 내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뼈에 사무치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는 상대성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깨달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나는 시편저자처럼 하느님을 향해 다음과 같이 자비와 용서, 그리고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 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는 얕보지 아니하시니, 어지신 마음으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의 성벽을 다시 쌓게 하소서.”(시편 51:17-18)

이처럼 단식은 하느님 앞에서 내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는 것이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나를 회복시켜 주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식을 통해서 나는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단식만이 나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웃을 해방시킬 수 있는 내적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단식을 하는 사람은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다”(이사 58:6-7)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참다운 단식을 통해 거듭 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을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고, 상처를 금시 아물게 하시며,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할 때, 야훼의 영광이 여러분의 뒤를 받쳐 주시길”(이사 58:8 참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