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일처리(루가8: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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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감추어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내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투명한 일 처리

 

예전에 선배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조직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선배는 “보고(報告)가 생명이다”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되돌아 보니, 그 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심지어 교회마저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감추어 둔 것들이 드러나 세상에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모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서 오는 폐해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국가의 행정, 기업의 업무 그리고 교회의 사역 모두 등불과 같은 공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 빛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빛으로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일을 함에 있어서 투명하고 공정하고 감추지 않는 태도가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하는 공무원, 기업인, 종교인이 많아져서 우리사회가 더욱 빛나게 되길 기도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내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오늘의 기도: “참 빛이신 당신을 닮아 세상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하소서.”

성공회신문 사설20170909

신자 사역자 활성화를 위한 몇 가지 과제

 

오늘날 한국의 모든 교회는 커다란 위기를 겪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더 이상 교회를 주목하지 않으면서 교회는 점점 늙어가고 있다. 많은 교회가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고, 예전의 익숙한 방식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더 이상 선교를 위해 헌신할 기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거기에다 우리를 포함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성직자 중심으로 교회를 치리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지체인 신자들이 소극적인 방관자 내지 심지어 ‘소비자’와 같은 모습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 교회는 “가서 제자 삼아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잘 응답하고자 신자사역자를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서울교구는 이미 4년 전 ‘세실대학’을 설립하여 벌써 2기 졸업생을 배출하여서 일선 교회현장에서 사제와 함께 교회사목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교구는 작년부터 ‘디모테오 학교’를 개설하였으며, 대전교구도 올 가을부터 ‘평신도 사목자 양성과정’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처럼 신자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들을 힘껏 양육하고, 이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세 개 교구의 선교의지는 협력과 소통을 중시하는 오늘날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동시에 주교를 중심으로 성직자와 평신도가 의회제도를 통해 교회를 함께 치리(治理)하는 성공회 정신과도 부합한다고 하겠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여러 교육 및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고양시키는 데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양된 신자들의 열의를 선교와 교회 사목현장에 잘 접목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교회현장의 사목에 별 활력을 불어넣지 못하였고, 심지어 교육무용론이라는 회의적인 태도도 생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 28:19-20)”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주님의 선교 명령인 것이다. 세 교구가 신자 사역자를 양성하고 선교와 사목의 동역자로 삼기로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응답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 교회의 선교의지가 잘 이루어 지려면 어떠한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인가?

우선, 교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이다. 사제도, 신자도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교회가 사제들만으로 혹은 일부 신자들 만으로만 치리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각자의 낡은 사고방식과 태도에서 회심의 길로 나와야 한다.

다음으로 신자사역자 교육과 졸업 이후의 과정이 필요하다. 신학생이 서품을 받아 성직자로서 교회에서 쓰임을 받듯이, 신자 사역자 역시 졸업과 안수 이후, 교회 공동체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구와 신자 사역자를 선발한 각 교회지체들이 이들을 선교의 동역자로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맞아 들이고, 지속적으로 돌보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필요하겠다.

마지막으로 신자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덕목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 불리는 사제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이지만, 오늘날 사제와 함께 선교 동역자로 일할 신자 사역자들에게도 사제들 못지않게 요구되는 덕목인 것이다. 이처럼 사제와 신자 사역자 모두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필립 2:7)”는 예수님을 닮아야 교회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신자 사역자 양성과 사역을 활성화 하려는 세 교구의 선교노력을 통해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등불을 비추길 바란다.

 

인간의 규칙, 하느님의 법칙(루가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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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규칙, 하느님의 법칙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것 보다는 오래된 것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사회에 있는 많은 규칙들은 이러한 우리의 익숙함과 그에 따르는 편안함과 안전함에 근거해서 만들어 집니다. 만일 어떤 규칙이 이러한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담아 낸다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심지어 그 규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규칙이 단지 우리의 익숙함과 그에 따른 편안함만 따라 간다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 만든 규칙이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는 그것을 깨고 나와야만 하는 모순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생각할 때, 저는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서 언급한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다수가 추종하는 기존의 문명, 문화, 또는 어떤 규칙에 대하여 창조적 성향을 가진 소수가 도전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역사는 진보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수의 아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 서를 읽으시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께서 읽으신 성경구절의 맥락을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자신의 선조들이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귀환할 때 불렀던 환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로마와 헤로데의 압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대목을 들으면서도 아주 먼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이자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에 이미 익숙해져서 현 질서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기에 이사야 서의 그 말씀에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께서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반기를 드십니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도전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당돌한 선언에 내심 놀라기도 하고, 그분의 설교에 탄복하면서도 반발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이 말속에 담긴 의미는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고? 감히 로마제국과 헤로데가 정한 규칙에 도전을 하겠다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당신이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인데, 뭐가 잘 나서 그런 당돌한 말을 하는가?”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도전적 언사를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도전에 화가 난 사람들은 그분을 동네 산 벼랑으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의 도전에 마을사람들의 ‘응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길을 가십니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인간의 규칙이 금이 가기 시작하고, 이제 하느님의 법칙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선포하신 메시아 시대를 실현하시기 위해 그 발걸음을 떼신 것입니다.

현상에 매몰된 인간의 규칙이 예수님의 도전으로 하느님의 법칙을 구현하기 시작합니다. 그 법칙이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歷史(History)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役事(Works)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인간들이 정하고 안주하고 있는 규칙을 초극하고 당신의 법칙을 완성해 가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규칙에 안주하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법칙을 보여주시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단지 예수님만 가신 길이 아닙니다. 우리도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이 편안한 규칙에 젖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설사 불편하더라도 일어나서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만든 규칙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느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만이 나와 우리 모두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여는 이 아침 감사 성찬례를 통해 새 시대를 여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빌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