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도원운동(성공회신문201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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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도원 운동’에 대한 소감

이경래 베드로 신부(서울교구 교육훈련국&선교국)

서울교구 선교국 부설 브렌든 선교연구소는 이웃 교단들 소속 사역자들이 만든 ‘개척학교 숲’과 협력하여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 of Church)’ 훈련과정을 시작하였다. 영국 성공회가 급변하는 새로운 문화와 상황 속에서 선교적 활동의 결실로 이룩한 이 훈련은 모두 16개 과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첫 과정인 ‘파이오니어 사역’훈련이 11월부터 한국에서 시작된다. 이 과정이 시작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성공회 내 세계적인 선교단체인 CMS(Church Mission Society)에서 공동체와 지역선교를 담당하고 있으며 『신수도원 운동』의 저자인 마크 베리(Mark Berry) 신자사역자가 방한하였다. 두 번에 걸쳐 대중강연을 하였는데, 그 중 10월 30일 대학로교회에서 한 ‘새로운 수도원 운동’에 대한 강연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이에 대한 본인의 소감을 적어 보고자 한다.

Monastic(수도원)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모노스(μονοσ)’에서 유래한다. 그 뜻은 ‘홀로’ 혹은 ‘하나’라는 뜻이다.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가 권력화되고 정치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고자 한 사람들이 사막으로 가서 침묵과 관상에 잠겨 하느님을 찾으려 했다. 사막의 은수자들은 홀로 또는 영적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였고, 이러한 사막의 수도원 운동은 점차 유럽으로 확산되어 성 베네딕트로 대표로 하는 정주형 수도원,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로 대표로 하는 탁발 수도원, 성 도미닉으로 대표되는 설교와 교육 수도원 모델 등으로 나타났다. 이들 수도원들은 사막의 은수자들과 달리 세상을 복음화 하는 선교에도 앞장섰다. 서울교구에 있는 브렌든 선교 연구소의 수호성인인 영국의 성 브렌든 수도자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헨리8세 때 영국이 로마와 결별을 하면서 헨리8세의 수장령에 반대했던 영국의 수도원은 강제로 해산되면서 영국의 수도원 운동은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으로 전례와 수도원 운동이 재건되기까지 기나긴 암흑기를 맞게 되었다.

마크 베리는 여기까지 수도원 운동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바로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영국의 신 수도원 운동을 소개하였다. 그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모달(modality)’과 네트워크와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소달(sodality)’이라는 교회의 두 가지 흐름을 말하면서 신수도원 운동은 소달의 범주로 설명하였다. 동시에 신 수도원 운동은 과거의 단절이 아닌 과거를 재구성하는 거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전통, 공동체, 영성, 선교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운동은 ‘수도생활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 of Religious Life)’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국의 종교개혁으로 수도원 역사가 단절된 동안 Devotio Moderna, 大대레사, 십자가의 성요한, 이냐시오 로욜라의 예수회 등과 같은 유럽대륙의 근대 수도원 운동을 경험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상호영향을 받고 있는 글로벌한 현대사회 속에서 새로운 수도원 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또 다른 하느님의 부르심 임에는 틀림없다고 본다. 세계 성공회의 이러한 좋은 경험을 잘 소화해서 한국사회에서 우리 교회가 새로운 영적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빛과 소금이 되길 희망해 본다.

성공회신문 사설20170909

신자 사역자 활성화를 위한 몇 가지 과제

 

오늘날 한국의 모든 교회는 커다란 위기를 겪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더 이상 교회를 주목하지 않으면서 교회는 점점 늙어가고 있다. 많은 교회가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고, 예전의 익숙한 방식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더 이상 선교를 위해 헌신할 기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거기에다 우리를 포함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성직자 중심으로 교회를 치리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지체인 신자들이 소극적인 방관자 내지 심지어 ‘소비자’와 같은 모습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 교회는 “가서 제자 삼아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잘 응답하고자 신자사역자를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서울교구는 이미 4년 전 ‘세실대학’을 설립하여 벌써 2기 졸업생을 배출하여서 일선 교회현장에서 사제와 함께 교회사목의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부산교구는 작년부터 ‘디모테오 학교’를 개설하였으며, 대전교구도 올 가을부터 ‘평신도 사목자 양성과정’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처럼 신자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들을 힘껏 양육하고, 이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세 개 교구의 선교의지는 협력과 소통을 중시하는 오늘날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동시에 주교를 중심으로 성직자와 평신도가 의회제도를 통해 교회를 함께 치리(治理)하는 성공회 정신과도 부합한다고 하겠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여러 교육 및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고양시키는 데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양된 신자들의 열의를 선교와 교회 사목현장에 잘 접목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교회현장의 사목에 별 활력을 불어넣지 못하였고, 심지어 교육무용론이라는 회의적인 태도도 생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 28:19-20)”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주님의 선교 명령인 것이다. 세 교구가 신자 사역자를 양성하고 선교와 사목의 동역자로 삼기로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응답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 교회의 선교의지가 잘 이루어 지려면 어떠한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인가?

우선, 교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이다. 사제도, 신자도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교회가 사제들만으로 혹은 일부 신자들 만으로만 치리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각자의 낡은 사고방식과 태도에서 회심의 길로 나와야 한다.

다음으로 신자사역자 교육과 졸업 이후의 과정이 필요하다. 신학생이 서품을 받아 성직자로서 교회에서 쓰임을 받듯이, 신자 사역자 역시 졸업과 안수 이후, 교회 공동체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구와 신자 사역자를 선발한 각 교회지체들이 이들을 선교의 동역자로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맞아 들이고, 지속적으로 돌보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필요하겠다.

마지막으로 신자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아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덕목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 불리는 사제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이지만, 오늘날 사제와 함께 선교 동역자로 일할 신자 사역자들에게도 사제들 못지않게 요구되는 덕목인 것이다. 이처럼 사제와 신자 사역자 모두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필립 2:7)”는 예수님을 닮아야 교회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신자 사역자 양성과 사역을 활성화 하려는 세 교구의 선교노력을 통해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등불을 비추길 바란다.

 

피터버러교구 방문기(20170722 성공회신문)

오래된 교회의 열정과 활기

이경래 베드로 사제(서울교구 교육훈련국&선교국)

영국 피터버러 교구는 서울교구의 자매교구이다. 서울교구는 피터버러 교구에서 하고 있는 평신도 사역자 양성 모델을 배워서 현재 세실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6월13일부터 19일까지 필자를 포함하여 서울, 대전, 부산교구 소속 4명의 사제들이 방문하였다. 특별히 이번 출장은 피터버러 교구가 실행하고 있는 성직자 인사와 지속교육, 사목과 새로운 선교활동, 평신도 사역자 양성, 청년사목, 교구행정 등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를 목적을 하였다. 그 중 몇가지 점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교구행정에 대하여

피터버러 교구 행정센터는 두 곳이다. 피터버러 대성당 옆에 있는 곳은 우리의 교무국에 해당하는데, 주로 재정과 재무, 인사를 비롯한 행정일반 업무를 관장하고 있으며, 노스햄턴 시에 있는 곳은 우리의 교육훈련국과 선교국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평신도 훈련, 사제의 지속적 양성 프로그램 개발, 새로운 선교전략 기획과 실행 등을 관장하고 있다. 그리고 두 곳의 교구행정 기능을 책임지는 총감사제(archdeacon)가 있어서 교구장 도널드 주교와 존 보좌주교의 사목방침을 실행하고 있다. 특별히, 노스햄턴에 있는 교구센터에서 우리는 교구의 다양한 사목과 선교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매 세션마다 평신도 사역, 사제 지속교육, 새로운 선교를 비롯해 교회관리 및 인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을 조정하는 부서까지 실로 영역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사제와 신자들이 와서 자신들의 업무를 설명하였다. 현재 한 두 사람이 위의 업무를 다 해야 하는 우리 실정에서 볼 때, 참으로 부러우면서도 우리도 이러한 인적▪물적 기반을 어떻게 확보하고 우리 상황에 적합한 교구행정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구축해야 할 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2. 교회 활성화를 위한 평신도 사역자 양성에 대하여

서울교구 세실대학이 모델로 삼고 있는 피터버러 교구의 평신도 사역자 양성의 특징은 소정의 과정을 이수한 신자들에게 주교가 보증하는 라이선스를 수여하는 점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시작하기 전에 일종의 ‘공동합의서(working agreement)’를 작성한다. 그리고 이것을 매년 검토하고 갱신하고 있다. 특히, 평신도 사역자는 사제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제와 신자 사역자들과 팀을 이루어서 교회를 활성화하고 있다고 한다.

3. 성장을 위한 선교전략

피터버러 교구는 두개의 선교 트랙을 갖고 있다. 하나는 교회 내적인 선교전략으로 ‘GAP(Growth Action Plans)’이라는 틀을 가지고 각 교회 마다 5년, 1년 목표를 정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진단하면서 성장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 외적인 선교전략으로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 of Church)’을 실행하면서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현재 현재 서울교구 선교국과 연결된 브렌든 선교연구소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4. 성직자 지속교육 시스템

피터버러 교구의 성직자 돌봄 과정 중 특별한 점은 서품 후, 3년 간 큐레이트라는 일종의 보좌사제 기간 동안 다양한 실천적 교육 시스템이다. 보좌사제 본인은 물론 관할사제도 보좌사세가 앞으로 사목을 잘 하도록 함께 사목 보고서 작성 및 실천과정에 참여해야 하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보좌사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보좌사제와 관할사제를 모두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의 사목적 역량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고 본다.

이상 짧은 일정동안 피터버러 교구에서 배우고 느낀 것을 간략히 소개했다. 존 보좌주교의 표현에 의하면, 피터버러 교구의 가장 큰 장점은 교구장 도널드 주교라고 하는데, 이 기간동안 본 주교님의 열정이 참 인상적이었다. 동시에 두 분 주교님의 사목적 고민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피터버러 교구 소속으로 있는 김병준 사제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푸른나래 공부방 이야기(2006.7. 연세대 자원봉사단 홈피에 올린 글)

20070919143202.208.0[1]한용외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이 양천구 신월동에 위치한 푸른나래 공부방에서 공부방 아동들과 함께 티셔츠 만들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2007.9.19. 이데일리 뉴스에서)

공부방 이야기 들려 드릴께요.

저희 공부방은 김포공항 옆(양천구 신월3동)에 있습니다. 처음에 이곳에 와서는 비행기가 저리 낮게 나는 것을 본적이 없어 무척 신기했습니다. 물론 그때 까지만 해도 시끄럽다는 생각은 못했지만 말입니다. 아이들은 그런 모습이 너무 일상이 된 것 같았습니다. 신월동 지역은 서울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이라고 모두가 말씀하시더군요. 실제로 아이들이 사는 동네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옷차림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계절이 바뀌기 전에는 자주 갈아입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교회 어머님들께 입던 옷을 여러 차례 구해다 아이들과 나누어 입기도 했습니다. 누가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지요. 거의 옷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지저분한 옷을 오래도록 입고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 손톱을 깎아 주어야 하고 이 닦는 훈련, 세수하고 손 닦는 훈련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과가 되기도 합니다. 부모님들이 이혼을 하거나 경제적 어려움들로 아이들이 보호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업은 학업대로 방치되어 있고 아이들 위생과 건강 또한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충치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무척 많습니다. 영양의 섭취가 불안정 하다 보니 빈혈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또한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천식 등 기관지가 약한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무척이나 밝고 활기차고 명랑하다는 것이고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비록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밝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공부방에 아이들은 30여명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 지역에서 저희 같은 공부방을 올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무척 많습니다. 공부방이 더 많아지면 어느 정도 아이들에게도 보탬이 되겠지요.

자원봉사를 해주는 교사들 그리고 작은 정성으로 꾸준히 후원해 주시는 교우 분들이 계십니다. 앞으로도 그런 분들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입니다. 잘 꾸려가 보겠습니다.

공부방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아이들이 사랑을 받고 그리고 그 사랑을 언젠가 필요한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마음을 배운다면 우리 공부방이 존재하는 큰 보람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회 신월동 공부방
이경래 (베드로)부제 올립니다.

http://www2.yonsei.ac.kr/love/life/help_read.asp?idx=2&page=18&SeqNo=61

중국교회 지도자 정광훈 주교 서거

중국교회의 지도자 정광훈(丁光训)주교께서 2012년 11월 22일 오전 10시 강소성(江苏省) 남경(南京)시에서 향년 98세로 돌아가셨다.

1915년 9월 20일 상해에서 태어난 정광훈 주교는 미국 성공회가 설립한 상해 성 요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성공회 사제로 서품 받은 그는 YMCA간사, 중화성공회 상해 구주교회(救主堂)보좌사제, 상해국제교회(国际教堂) 사제로 봉직하였다. 그 후, 캐나다에서 기독교학생회 선교간사로 일하다가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런 다음,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계기독학생연맹 총무로 일하였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된 후, 그는 동료들의 우려와 만류를 뒤로 하고, 조국에 돌아가 사회주의체제하에 놓인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 당시, 화동지역 12개 신학교가 남경에서 금릉연합신학원으로 합병되었을 때, 원장을 맡아서 후진양성에 힘썼고, 1955년 성공회 절강교구 주교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와중에는 모든 종교기관이 폐쇄되는 바람에 그 역시 혹독한 탄압을 받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노선으로 전환되면서 중국의 종교가 복원됨에 따라 그는 다시 문을 연 금릉연합신학원 원장 및 남경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면서 신학계와 지식인 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중국기독교협의회를 설립하여 회장을 역임하면서 중국교회 재건에 노력하였다. 또한 애덕기금회를 설립하여 자선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역임하여 정부에 대하여 종교가 올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정광훈 주교의 서거소식이 알려지자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을 위시하여 종교계, 지식인계 및 각계각층의 신자와 대중들로부터 애도의 뜻이 전해져 왔다. 11월 27일 오전10시30분 남경시 우화구(雨花区) 장례식장에서 고별식이 거행되었다. 많은 꽃들로 둘러싸인 그의 몸 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기가 덮어져 있었고, 호금도(胡锦涛)주석을 비롯한 중국지도부의 애도의 전문과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서 화장을 치뤘다.

故 정광훈 주교의 추모예배는 12월 8일 오후 1시30분 남경 막추로교회(莫愁路教堂)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고별식 뉴스:   http://v.ifeng.com/vblog/news/201211/e3699808-7e63-41ef-aaa4-7645048378ea.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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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진 소개글(퍼옴)

[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⑨ 톈진(天津) [중앙일보]

쿠데타 성공한 영락제가 이름 지은 톈진 … 외래문화 반기는 ‘중국의 창’

입력시각 : 2011-08-22 오전 12:08:00

톈진(天津)시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의 관문도시다. 톈진의 신개발구 ‘빈하이(濱海) 신구(新區)’는 상하이 푸둥(浦東)과 같은 국가급 전략 개발 구역이다. 서울의 관문도시인 인천 송도와 유사하다. 위상은 같지만 외자유치 성적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빈하이 신구가 유치한 외국인 투자 총액은 송도의 100배에 달하는 46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톈진의 어제와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살펴본다.

신경진 기자

열강의 교두보 … 조계 면적 중국서 가장 넓어


79층 높이의 톈진 세계금융센터 전망대를 찾은 한 관광객이 톈진시 전경을 내려보고 있다. 톈진 세계금융센터는 창장(長江) 북부의 최고층 건물로 세계 고층건물 중 25위의 높이를 자랑한다. [중앙포토]

14세기 말 몽골이 세운 이민족 왕조 원(元)이 쇠락하자 전 중국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난징(南京)을 점령한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넷째 아들 주체(朱棣·훗날의 영락제(永樂帝))를 연왕(燕王)에 봉하고 북벌을 명했다. 원의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서 몽골을 몰아낸 주체는 북방에서 황제의 꿈을 키워갔다. 하지만 주원장은 제위를 장손인 주윤문(朱允炆·건문제(建文帝))에게 물려주고 사망했다. 성난 주체는 조카를 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주체의 쿠데타 군은 소직고(小直沽)로 불리던 지금의 톈진에서 배로 갈아 타고 대운하를 따라 남하를 시작했다. 이른바 ‘정난(靖難)의 변’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뒤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영락제는 ‘천자가 건넌 나루’라는 뜻으로 톈진(天津)이란 이름을 내린 뒤 성을 쌓고 연못을 파도록 명령했다. 톈진이라는 이름의 유래다. 톈진이란 이름은 그 밖에도 굴원(屈原)의 대표작 ‘이소(離騷)’ 중 ‘아침에 은하수 나루를 떠나(朝發軔于天津兮)’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하늘의 별자리 28수(宿) 하위에 속한 별의 이름인 천진(天津)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황제의 나루터이자 별자리의 나루터였던 톈진은 청(淸) 말엽이 되자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전락했다. 전 중국에서 조계(租界)의 숫자와 면적이 가장 넓은 능욕의 도시가 됐다. 조계는 조약을 통해 한 나라의 영토에 행정자치권과 치외법권을 갖는 합법적인 외국인 거주지를 할양해 준 지역을 말한다. 보통 반식민지 국가가 열강에 통상도시 안에 빌려준 땅을 말한다. 당시 서구 열강은 1840년 아편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중국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지 못해 속을 태우고 있었다. 마침 1856년 광저우(廣州)에서 터진 애로호 사건은 2차 아편전쟁의 좋은 구실이 됐다. 서구열강은 1858년 톈진 다구포대(大沽炮台)를 점령해 톈진조약을 체결하고 베이징의 황실 공원 원명원까지 약탈한다. 1860년에는 베이징조약을 통해 옛 톈진성의 8배에 달하는 면적의 톈진 동쪽과 동남쪽 지역을 조계로 차지했다. 영국과 미국을 시작으로 1902년까지 프랑스·독일·일본·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벨기에 등 9개국 조계가 톈진을 잠식해 들어갔다.

제국주의 열강은 확보한 조계지를 자국 스타일의 건축물로 채워나갔다. 상하이 와이탄(外灘)에 견줄 만한 만국 건축박물관이 탄생했다. 조계지의 도로 이름도 각양각색이었다. 보통의 중국 도시가 동서 도로를 가(街), 남북 도로를 로(路)로 이름 붙이는데 반해 해안선으로 인해 대각선 도로가 발달한 톈진은 서북에서 동남쪽으로 향하는 대각선 도로는 로(路), 동북-서남선은 도(道)라고 이름 붙였다. 약 70개의 도로를 차지했던 영국은 지금의 해방북로(解放北路)인 금융중심가 빅토리아도(道)를 비롯해 디킨스·그리니치 등 유명인의 이름 및 영국 지명을 따서 이름 붙였다. 프랑스 조계는 직위를 덧붙인 사람 이름을 차용했다. 지금의 하얼빈도가 디옹총영사로였던 식이다. 독일 조계는 인명 이외에도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벳을 이용해 1호가, 2호가, A가, B가 식으로 이름을 지었고, 러시아는 페테르부르크로와 같이 러시아 지명을 이용했다. 이탈리아 조계는 마르코폴로·단테·피렌체 등 낭만적인 이름을 사용했다.

조계를 통해 서구 문명의 세례를 받은 톈진은 각성했다.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양무운동의 전진기지가 됐다. 철도·전보·전화·근대교육 등이 중국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보급됐다. 1903년 당시 직예총독 겸 북양통상대신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톈진에 신도시를 건설한다. 중국 최초로 서구 현대 도시 계획 이론을 채택해 ‘북양신성(北洋新城)’이란 이름을 얻었다. 신해혁명 이후 북양군벌 휘하로 들어간 톈진은 1923년 당시 총통 리위안훙(黎元洪)에 의해 잠시 중화민국의 정부 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1928년 국민혁명군이 점령하면서 톈진특별시가 성립됐다.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는 영국 조계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일본 패망 후에는 미군 2만 명이 톈진에 진주해 조계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국공내전 중이던 49년 1월에는 톈진을 포위한 34만 명의 공산당군이 29시간의 전투 끝에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톈진 인민정부를 수립했다. 신중국 성립 직후 중앙직할시였던 톈진은 58년부터 67년까지 허베이(河北)성에 포함되기도 했다. 76년 7월 28일에는 진도 7.8의 탕산(唐山) 대지진 여파로 톈진에서 2만4345명이 사망하고 70여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비극을 겪었다.

19세기에 이미 외지인 천국 … 문화의 교차로 역할


톈진시 빈하이 신구에 위치한 유럽 에어버스 항공기 조립공장. 이 공장은 유럽 이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에어버스 공장이다.(왼쪽)톈진의 대표적 먹을거리로는 거우부리바오쯔(狗不理包子) 만두, 얼둬옌자가오(耳朶眼炸糕) 찹쌀떡, 스바제마화(十八街麻花) 꽈배기를 꼽는다. 사진은 톈진의 대표적 먹을거리 타운인 남시식품가(南市食品街).

조계의 도시 톈진은 문화의 교차로다. 다원적인 문화가 중첩된 독특한 도시다. 톈진사범대 탄루웨이(譚汝爲) 교수는 톈진을 열 가지 문화코드로 해부한다. 첫째, 바다와 강(海河)의 문화다. 역사적으로 강줄기를 자주 바꿨던 황하는 세 차례 톈진 부근을 거쳐 보하이(渤海)로 흘러 들어갔다. 또 대운하와 대청하(大清河), 영정하(永定河)가 톈진을 지난다. 즉 톈진의 존립 기반은 물(水)이다. 물의 문화는 유동적이다. 톈진의 개방성과 포용성·다원성은 모두 물에서 나왔다.

둘째, 성(城) 문화다. 1920년대까지 남아있던 톈진의 옛 성은 고아(高雅)한 문화의 요람이었다. 성곽 안은 북쪽은 부유하고, 동쪽은 고귀하고, 남쪽은 천하고, 서쪽은 가난했다. 톈진 성곽을 따라서는 공북(拱北), 정남(定南), 안서(安西), 진동(鎭東) 4대문이 자리 잡았다. 성 안에는 문묘, 서원, 근대 교육시설과 문화 명인들의 옛 집들이 수많은 스토리를 품은 채 지금까지 전해내려 온다.


20세기 초에 제작된 톈진시 조계지도.

셋째, 사묘(寺廟) 문화다. 톈진에는 마조(媽祖) 여신을 모시는 사당, 공자를 제사 지내는 문묘와 관우를 모신 사당을 비롯해 대비원(大悲院)까지 도교·유교·불교 사원이 다양하다. 그뿐 아니라 이슬람 사원, 천주교 성당까지 다양한 종교 사원이 혼재하고 있다. 토착 주류 문화가 약하고 유동성이 강한 항구 도시 톈진의 주민들은 기복 신앙을 발달시켰고 여러 종교를 폭넓게 받아들였다.

넷째, 이민 문화다. 1845년 기록을 보면 당시 톈진의 토착민은 740호로 전체 거주민 총수의 2.28%에 불과했다. 톈진은 외지인의 천국이었다. 이민자 사회도 상·중·하 등급으로 나뉘었다. 하층 이민자들은 근대 공장의 노동자, 항구의 쿠리, 인력거꾼, 길거리 소매상을 비롯해 걸인까지 대도시의 밑바닥을 전전했다. 중산층 이민도 톈진으로 몰려들었다. 중소기업가, 지식인, 경영자, 과학기술자, 예술가들이 톈진 문화의 중추를 맡았다. 군벌정객, 망한 청나라의 유신, 지방 부호 등 상층 이민자들은 톈진 조계 지역으로 흘러 들어와 톈진시의 돈줄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대규모 이민은 남북과 아속(雅俗)이 뒤섞인 다양성의 자양분이 됐다.

다섯째, 군사 문화다. 명나라 영락제는 베이징 천도 후 톈진의 군사적 중요성을 의식해 군사 기지인 위(衛)를 설치했다. 제국의 수도와 제일 가까운 해변의 방어를 맡겼다. 주둔 병사, 조운 수비병,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 위안스카이의 신군(新軍)이 톈진을 무대로 활약했다. 군인과 가속이 모여 살았던 톈진은 호탕하고 진솔하며, 호불호가 분명하고, 의롭고 용맹한 문화를 만들었다. 의화단사건과 톈진교안은 모두 톈진인 특유의 의협심의 발로였다.

여섯째, 조운(漕運) 문화다. 톈진은 역사적으로 북방 운하의 핵심지였다. 물류의 중심으로 교통의 중추였다. 해양신인 마조묘가 세워진 이유다. 조운은 남북의 곡물과 소금의 유통뿐만 아니라 문화의 교류와 융합을 가져왔다. 톈진은 수도의 문화와 이 지역에 있었던 연(燕)·조(趙)나라의 문화, 산둥의 제(齊)·노(魯) 문화뿐만 아니라 강남과 멀리 푸젠, 광둥의 민(閩)·월(粤) 문화까지 용광로처럼 녹여냈다.

일곱째, 개항장 문화다. 조운을 통한 상업의 기회와 소금 유통업의 발달은 톈진을 일약 북방 최대의 상업 도시로 변화시켰다. 톈진은 150여㎞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염전이 발달됐다. 지금도 연간 240만t의 소금이 생산된다. 전 중국 생산량의 10분의1을 차지한다. 거대한 소금상인들은 문화의 스폰서 역할을 도맡았다. 명·청 이후에는 안후이·광둥·푸젠·저장·장쑤 등 남방 각 성의 상인들이 톈진으로 모여들었다. 각각 동향 회관을 만들어 조직을 꾸리고 상업 활동을 펼쳤다.

여덟째, 부둣가 문화다. 청대 이후 톈진은 수재 등 자연재해를 당한 난민들의 집결지였다. 부둣가의 시장 문화는 경극과 같은 민간예술을 발달시켰다. 또 거우부리(狗不理) 만두와 같은 특색 있는 음식도 탄생시켰다. 부둣가에는 유동 인구가 많다. 개방성과 포용성을 가져왔고, 경쟁력과 위기의식, 자유정신과 적응 능력도 생겼다.

아홉째, 앞에서 본 조계 문화다. 통상항구 톈진은 자본주의 세례를 받았고, 교회·서양식 상점과 상가들이 밀려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자선 문화다. 명·청대 톈진의 염상 부호들은 독실한 불교신자가 많았다. 선을 베푸는 데 아낌이 없었다. 자선소, 보육시설이 속속 생겼다. 지역의 유력자 신사(紳士)들은 자선기구를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복합적인 문화적 DNA를 가진 톈진은 지금 빈하이 신구에 유럽 에어버스 조립공장을 유치하는 등 첨단산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미래를 향한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 대주교 데이빗 어커트(David Urquart)중국교회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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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30일, 영국성공회 대주교 데이빗 어커트(버밍햄 교구장) 일행 2명이 중국기독교 양회(중국기독교협의회,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방문했다. 중국기독교양회 책임자들은 방문일행과 우정 어리고 깊은 회담을 가졌다. 쌍방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협력관계를 강화해 가기로 하였다.

회의에서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 부선위(傅先伟)장로는 영국성공회가 지금까지 베풀어준 지지와 도움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중국기독교 양회를 대표하여 캔터베리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에게 안부를 전해주길 부탁하였다. 중국기독교협회 회장 고봉(高峰)목사는 방문일행에게 중국교회의 상황을 소개하였다. 이 자리에서 고 목사는 중국기독교양회는 특별히 교역자 양성, 신학교육, 성경출판, 사회복지 등을 중요시 여기고 있으며, 한편, 새로운 역사적인 시점에서 중국교회 역시 새로운 문제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고 목사는 역대 대주교 모두 중국을 방문해 주는 등, 영국 성공회와 중국기독교 양회는 지금껏 줄곧 깊고 두터운 우의를 지속해 오고 있기에, 쌍방이 이러한 교류를 통해 보다 깊은 우의와 한층 진일보한 협력을 맺어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데이빗 어커트 주교는 답사에서 중국기독교양회의 모든 교역자들에 대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안부와, 중국기독교 양회가 하고 있는 각종 일들이 아주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대한 축하를 전했다. 이어서 데이빗 주교는 영국성공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특별히 데이빗 주교는 이후에도 신학교육방면에서 쌍방이 계속해서 협력하길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부선위 장로는 데이빗 주교가 성경연구 및 오늘날 상황에 대한 사려 깊은 관점을 가진 것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면서, 앞으로도 이러한 부문에 있어서 협력하길 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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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양측은 교회일치, 성직서품 등의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나눴다. 이 회담은 양측의 우의를 더욱 공고히 하고 깊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측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성 삼위일체성당(圣三一堂)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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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일 중국기독교 협의회 공식 홈페이지에서 번역

참고: 버밍햄(Birmingham)교구의 교구장인 데이빗 어커트 주교는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중국특사로 임명 받아 활동하고 있으며, 2006년 10월 캔터베리 대주교가 중국을 공식방문했을 때 수행했던 분이다.

2008년 1월 중국기독교 양회 새 임원 선출

高峰牧师

중국 기독교 제8차 대표회의가 2008년 1월 12일에 열렸고,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제7차, 중국기독교협회 제5차 상무위원회 사업보고에 대한 결의’,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장정에 대한 결의’, ‘중국기독교협회장정에 대한 결의’, ‘중국기독교의 2008년 북경올림픽에 대한 결의’, ‘중국기독교의 경제사회 발전을 위한 공헌에 대한 선언’을 통과했고,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제8차 및 중국기독교협회 제6차위원 181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다음 차수의 양회위원회를 발족했다.

1월 12일 19시,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제8차, 중국기독교협회 제6차 위원회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고, 84명의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제8차 상무위원과 중국기독교협회 제6차 상무위원회 위원을 선출했고,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제8차 주석, 부주석, 비서장, 중국기독교협회 제6차 회장, 부회장, 총간사를 선출했다. 또한 다음 차수의 중국기독교양회 자문위원회 위원을 통과 했고,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제8차 명예주석, 중국기독교협회 제6차 명예회장을 선출했다.

傅先伟장로가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于新粒목사, 安信义목사, 余文良목사, 沈学彬목사, 陈顺鹏동역자, 金蔚동역자 등이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부주석에 당선되었으며, 徐晓鸿목사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비서장으로 당선되었다.

高峰목사는 중구기독교협회 회장에 당선되었고, 吕德志목사, 范承祖목사, 林志华목사, 倪光道목사, 高英牧师, 唐卫民목사가 중국기독교협회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阚保平목사가 중국기독교협회 총간사로 당선되었다. 罗冠宗동역자는 자문위원회 명예주석으로 추대되었다. 季剑虹장로와 曹圣洁목사는 각각 자문위원회 주임을 맡게 되었다. 丁光训주교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명예주석, 중국기독교협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전체 위원은 거수로 표결했으며, 이상의 인선에 대해 동의했고, 중국기독교 제8차 대표회의를 선포했다. 당선된 주석, 회장, 부주석, 부회장, 비서장, 총간사의 간력은 다음과 같다.

于新粒(어신립/위씬리),남,한족, 1939 년생,전문대학력,목사。북경시 기독교양회주석,회장, 북경시정협상임위원. 증경 중국기독교협회 부총간사

吕德志(여덕지/뤼더즐),남,한족, 1964 년생,석사학력,철학박사를 밟고 있슴. 목사. 흑룡강성 기독교협회 회장, 하얼빈시 기독교양회주석, 회장, 흑룡강성 기독교성경학교 부교장, 하얼빈시 정협상임위원. 증경 중국기독교협회 부총간사.

安信义(안신의/안씬이),남,한족, 1949 년생,대졸학력, 금릉협화신학원 교목 석사반 졸업, 목사, 현재 강소성 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 전국정협위원, 강소성정협위원

余文良(여문량/위원량),남,傈僳族, 1958 년생,고졸학력, 목사.현재 운남성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 전국정협위원

沈学彬(심학림/션쉬에린),남,한족, 1955 년생,대졸학력, 목사. 현재 상해시 삼자애국운동위원회 부비서장, 상해시 정협위원, 푸동신개발구 정협위원

陈顺鹏(진순붕/천슌펑),남,한족, 1948 年生,대졸학력. 현재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부주석, 광동성 기독교삼자애국회 주석, 전국정협위원

范承祖(범승조/판청주),남,한족, 1938 年生,전문대졸학력, 목사, 현재 중국기독교협회 부회장, 내몽고자치구 기독교양회 주석, 회장, 전국정협위원.

林志华(임지화/린즐화),남,한족, 1940 年生,대졸학력, 목사, 현재중국기독교협회 부회장, 복건성기독교협회 회장, 복건신학원부회장, 전국정협회원

金蔚(금위/진웨이),여, 한족, 1951 年生,대졸학력, 현재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위원회 부주석, 중화기독교청년회, 여청년회전국협회총간사, 전국정협위원, 전국부녀연합위원

倪光道(예광도/니광따오),남,한족, 1941 年生,중졸학력, 목사. 절강성기독교협회 부회장, 항주시 기독교삼자애국운동회 주석, 성정협위원.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비서장.

徐晓鸿(서효홍/위쌰오홍),남,한족, 1964 年生,대졸학력, 금릉협화신학원 교목 석사반 졸업, 목사. 기독교전국양회출판부 주임, 섬서성기독교양회 부주석, 부회장 및 총간사, 섬서성경학교 부교장 및 교무장. 증경 중국기독교삼자애욱운동위원회 비서장

高英(고영/까오잉),여,한족, 1954 年生,문학석사,목사. 현재 금릉협화신학원 부원장, 북경기독교여청년회회장, 중국종교평화위원회 부비서장, 북경시정협위원

高峰(고봉/까오펑),남,한족, 1962 年生,신학석사,신학박사 연구중, 목사. 산동성 정협위원. 증경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부주석

唐卫民(당위민/탕웨이민),남,한족, 1965 年生,대학학력,금릉협화신학원교목 석사반 졸업, 목사. 현재 하남성 기독교협회 회장, 하남성 정협위원

傅先伟(부선위/푸씨엔웨이),남,한족, 1944 年生,대학학력,금릉협화신학원교목 석사반 졸업, 장로. 상해시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 전국정협위원, 증경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부비서장

阚保平(감보평/칸바오핑),남,한족, 1957 年生,신학석사,목사. 기독교전국양회 연구부 주임, 증경 중국 기독교협회 부총간사

2008년 1월 12일  중국기독교 협회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