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르 1:14-20)20180108

images7BR67HUW나해 연중 1 주간 월요일(사무엘 상 1:1-8 / 시편 116:11-15 / 마르 1:14-20)

우리말에 ‘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떠한 시기 혹은 기간이라는 뜻도 있고, 적절한 혹은 적합한 시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컨대, “When I was young(내가 젊었을 때)”에서 ‘때’란 전자의 의미이고, “There is a right time for everything(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의 ‘때’란 후자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 두가지 종류의 ‘때’가 있습니다. 오늘 들은 독서 사무엘 상권을 보면 엘카나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중 한나는 자식이 없어서 자식이 있는 브닌나에게 멸시를 당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인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불이익과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심지어 소박을 맞고 쫓겨날 정도로 존재자체의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남편 엘카나가 아무리 아내 한나를 사랑하고 위로해 준다고 한들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참으로 한나에게 고통스러운 시기요, 괴로운 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시편 116장 11절은 이러한 고통의 때를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하도 심할 때에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한나와 시편저자처럼 우리는 모두 실존적으로 고통스런 ‘때’를 겪었고, 겪고 있고, 겪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외면당하고, 잊혀지고 그래서 이 고통에 대해 하소연하고 구해 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해 보지만 만일 하느님이 아무런 대답도, 어떠한 위로도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저 역시 이러한 때를 당하면 ‘인내(忍耐)’, ‘인고(忍苦)’라는 말 외에는 달리 견뎌낼 뾰족한 길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서운 비바람을 맞으며 걸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때’는 어떠한 기간만을 뜻하는 고정된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전환의 시간, 변화의 분기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때를 감지할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맞이할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 1장 1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우리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 있을 때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려 봐도 응답 받지 못할 때라도 하느님은 우리가 모르지만 그 변화의 때를 예비해 두십니다. 그리고 때가 다 되었다, 때가 다 찼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회개란 어쩌면 하느님의 이 선언을 듣고 절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달리 표현하면 ‘응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네 명의 어부-시몬, 안드레,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회개와 응답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1: 17)”고 말씀하시자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이 응답은 그들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전환의 순간이요, 변화의 때였습니다. 이 때를 계기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때’는 이처럼 우리 인생의 길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때’에 있습니까? 한나와 시편저자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시고 계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4명의 어부들처럼 변화와 전환의 때에 서 계십니까? 만일 전자라면 힘들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실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의 은총을 간구하며 이겨내 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만약 후자라면 그것이 진정 하느님의 부르심 인지 아니면 여러분 욕망에서 나오는 건지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분별의 은총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되든지 우리 신앙인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라는 믿음입니다. 임마누엘을 믿을 때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 중에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날 지라도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가 기쁨 중에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실 것이며, 변화와 선택의 때에 올바른 길로 불러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때’의 주관자이신 임마누엘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중국사역을 마감하면서(20171207)

201006 004예레 1:4-12 / 시편 42:1-5 / 루가 19:29-40

중국 사역을 마감하면서

짧게는 2010년부터 2016년 초까지, 길게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중국사역을 마무리하며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신부님과 교우님들과 감사성찬례를 봉헌하게 되어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감사성찬례에 봉독 할 성경말씀을 고르면서 그 동안 겪어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2000년 6월 15일 신대원생 시절 저는 평양 순안공항에서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을 보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서 기도할 때 저는 ‘중국’이란 단어를 떠올랐고, 마침 그 무렵 방통대 중문과를 다니던 제 아내가 중국에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해서 속으로 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그 일이 있고나서 저는 중국과 중국교회에 대해 알면 이북과 장차 이북선교를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중국사역은 이렇게 해서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르심 받았을 때처럼 아이와 같은 상태였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져온 어린 나귀 와도 같았습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러기에 그런 모험을 감히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그 후, 정철범 주교님께서 우리 교단에 중국전문가가 필요하니 공부하라는 명을 주셨고, 마침 예수사랑선교회에서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와 봉헌금을 전해 주신 덕분에, 대한성공회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선교자금이 아닌 순수 국내 신도들의 헌금으로 해외유학을 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정철범 주교님과 예수사랑 선교회 신부님과 교우님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06년에 귀국하여, 저는 광명, 대성당, 간석교회와 신월동 지역아동센터 그리고 나눔과 평화재단에서 시무하면서 부제와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중국 남경에 있는 국가 급 신학교에 교수요원으로 성공회 성직자를 보내기로 영국성공회가 중국교회가 합의하였고, 이 일로 교회선교회(CMS) 서울 사무소에서 면담을 하였는데 저는 여기에 자원하였습니다. 이 때 서울사무소 소장이신 나성권 신부님께서 이 일이 성사되도록 많은 애를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박경조 주교님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러가지 이유로 이 일을 결국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 김근상 주교님 때, 영국CMS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성 중 하나인 귀주성 신학교에 파송하는 걸로 서울교구와 협의했지만 서울교구의 의지부족으로 이것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합법적으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모든 경로가 막히게 되었고, 저는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라고 여기고 생각을 접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신자가정의 기도와 후원으로 극적인 계기가 마련되었고, 이 보고를 들으시고 주교님이 이 선교자금으로 갈 수 있다고 여기시고 허락해 주셔서 다시 중국선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2010년 3월 저희 세 식구가 중국 천진 땅을 밟았을 때,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저는 우선 여기서 뿌리내리기 위해 여러 대학의 문을 두드렸고, 다행히 천진사범대학과 천진상무학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어서 비자문제 해결과 약간의 경제적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중국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신문사 특파원도 하고, 대학교재도 출판하고 때로 중국에 진출하려는 한국의 중소기업들의 통역사도 하다가 나중에는 그들을 위한 컨설팅도 하게 되는 등, 여러가지 사회경험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낯선 땅에서 교회라는 제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저를 훈련시키시고 폭넓은 안목과 인생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시편말씀처럼 저는 한편으론 낙심과 불안과 고독으로 심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제로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보장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한국의 교회 와도 마치 잊혀진 존재처럼 되었다는 점이 저를 우울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물질적으론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나 영적으론 사막과도 같은 곳이라고 여기던 중국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중국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는 교회지만 신자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그 중에는 우리 성공회 전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중국 목회자 그룹도 생기게 되었고, 실제로 이들은 자생적으로 자신들의 교회에서 성공회 전례를 거행하고, 성공회 기도서를 편찬하고, 다른 지역 목회자들과 신도들에게 알리고 교육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중국인구규모와 문화혁명 기간 중 극심한 박해를 이겨낸 중국인 신자들의 저력으로 볼 때, 장차 중국교회는 아시아의 그리스도교를 선도하는 맏형으로 우뚝 솟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16년 저는 오랜 중국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까지 올 여름 귀국해서 중국에서의 사역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교구의 교육훈련국과 선교국을 책임 맡고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구는 지금 참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누적된 과거의 관행과 변화된 사회환경으로 교회의 사목은 예전보다 훨씬 힘들게 되었습니다. 다시 교회를 새롭게 재건해야 될 시점입니다.

교구에서 일하면서 저는 종종 주님께 묻습니다: “저를 여기로 오게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저는 아이라서 이 힘든 일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입니다.”

그럴 때마다 루가 복음의 말씀, “주께서 쓰시겠답니다”와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중국사역을 마감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 교회를 위해 주님께서 하시려는 것이 어떤 건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이 와도 같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나귀가 되어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신 고통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처럼 영광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는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우리의 본성은 고통보다 영광을 원하지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선 고통이라는 인내의 시간을 잘 견뎌내야 할 것입니다.

이 감사성찬례가 하나의 매듭을 짓는 자리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순례의 여정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이 순례의 여정은 우리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전쟁의 공포가 어느 때 보다 높은 한반도에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주님의 깊은 섭리로 가는 여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중국사역을 위해 기도와 후원을 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 사역을 기획하시고 이끄시고 우리를 한데 불러 모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성가>

입당 406 / 봉헌 498 / 파송 411

현재로 온 새로운 과거(루가20:27-40)

KakaoTalk_20171124_090342753오늘의 말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오늘의 묵상: 현재로 온 새로운 과거

부활은 크리스천 신앙의 핵심이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과 사두가이파 학자들 간에 부활에 대한 논쟁에서 학자들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형제들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이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다가, 지난 달 서울시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서울시에서는 정동역사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정동일대 덕수궁을 중심으로 영국, 러시아, 미국 등의 서양열강 대사관, 그리고 성공회, 감리교, 구세군 교회 등의 종교기관, 또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의 서양식 교육기관 등의 역사적 건물과 길을 복원한다고 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캐치 프레이즈가 “깨어나라, 대한제국이여!”입니다. 구한말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주적인 제국을 이루고자 몸부림쳤던 고종의 꿈을 부활시키는 기획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과거를 복원하고 대한제국의 부활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과거의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꿈꾸었던 이상이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그 꿈은 현재에서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완전한 실현을 위해 또 다른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사두가이파 학자들이 언급한 여인은 여러 형제들의 아내가 되었으나 자식도 얻지 못하고 그 가문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대한제국도 이 여인처럼 나라의 존립을 위해 이 나라 저 나라에 의지했으나 결국 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살아있는 하느님을 고백한다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은 과거가 아닌 과거요, 현재에서도 생생히 살아있는 과거일 것입니다. “깨어나라, 대한제국이여!”를 들으면서 구한말 우리 선조가 꿈꾸었던 소망이 살아나길 기도해 봅니다.

오늘의 기도: 모든 민족이 당신 앞에 살아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루가 14:25-33/로마13:8-10)

intentional-discipleship가해 연중 31주 수요일 (로마 13:8-10 / 루가 14:25-33)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 교회는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성공회 형제자매 교회 간의 상통과 일치를 위한 4가지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세계 성공회 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 약칭: ACC)’가 있습니다. ACC는 주교, 사제,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공회 내외적으로 직면하는 다양한 사안들에 대하여 함께 모여 논의하고 연구하고 조언해주는 곳입니다. 2016년 ACC에서 ‘제자도와 제자삼기(Intentional Discipleship and Disciple-Making)’란 제목으로 공식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문서는 성공회 신자가 단지 ‘신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되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올해 10월 한국의 3개 교구 주교님들이 참석하신 미얀마에서 열린 ‘동아시아 성공회 주교회의’에서도 세계 성공회가 정한 핵심 방향인 ‘제자도’에 대하여 진지한 토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믿는 이들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온 선교구호가 아닙니다. 이것의 근원은 예수님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해선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것도 3차례에 걸쳐 강조하십니다. 첫번째 강조구절은 2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표현에 대하여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 히브리어 특성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겠습니다. 히브리어와 예수님이 사용하셨다는 갈릴리 지방어인 아람어에서는 비교급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자신을 미워하라’는 표현은 진짜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자기 혈육이나 자신을 더 사랑한다면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두번째는 27절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세번째는 33절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자기자신을 덜 사랑하라”, “자기 십자가를 져라”, “자기가 가진 것을 버려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이 모든 말씀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小我를 벗어나서 大我로 나아가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참된 나, 하느님과 일치된 나, 세상만물과 하나된 내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비롯해 내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물건이나 사람들 속에 갇혀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단지 계명준수라는 소극적인 실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9-10)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마침표이자 완성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듯이,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신중히 숙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창피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 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하고 비웃을 것이다.”(루가14:29-30)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고민에 빠집니다. 세례 받아 이미 신자가 된 우리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이제 어찌해야 되나? 그분을 따르자니 어렵고, 따르지 않자니 큰 일이고…… 참으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우리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울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성부께 간절히 기도 드리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도 함께 해 주십니다. 요한복음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시고 다음과 같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 33)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나에게 부과되는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하는 자기희생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증오와 미움과 질투와 복수는 어떤 의미에선 삶에 에너지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나와 모두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오직 사랑만이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가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의 길을 함께 걷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협조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며 하루를 여시길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권리와 의무(루가12:35-38)

untitled권리와 의무

예전에 친구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친구가 군대생활 때 느낀 경험담입니다. 당시 연대본부 소속인 친구는 자신이 속한 작은 부서가 해야 할 일을 어떻게 잘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체 연대가 훈련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연대장을 보면서 “고민의 규모가 다르구나”하고 느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 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많이 받고, 많이 맡은 것에 흠뻑 취해 지내기 쉬운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우리가 잊지 말고 실천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켜 주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라고 생각될 지 모르지만,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아주 어렵기만 합니다.

그동안 저는 한직만 맴돌다가 올 봄 중앙기관의 중요부서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보고 듣는 것이 제한적이다 보니, 제 몸 하나 잘 추수르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접하다 보니, 내어 놓아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이 하신 오늘의 말씀이 저 들으라고 하신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으려고 노력하는 저를 보면서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못 알아듣거나 화를 내며 거부하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연대훈련을 잘 치룰 수 있도록 고심했던 연대장처럼 저도 맡겨진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으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당신의 말씀은 내 삶의 등불입니다.

 

 

untitled가해 연중 28주 월요일 (로마 1:1-7 / 루가 11:29-32)

기적”을 볼 수 있는 안목

오늘 들은 제1독서는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의 첫 부분 인사말입니다. 로마서는 신약성서 배열순서 상 가장 먼저 온 첫째 서간이고 제일 길고 신학적인 내용도 가장 풍부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활동이 원숙한 말년에 써서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는 로마서 앞머리에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부르심 받은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유대인 안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 에게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갈릴리와 유다라는 제국의 변방이 아닌,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서 말입니다. 실로 기적과도 같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도 ‘기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 뭔가 기이하고 신기한 일들을 일으켜 주길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요나의 기적 밖에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루가11:30)고 탄식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요나는 당시 북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뜨린 아시리아 왕국의 수도 니느웨 백성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다가 고래 밥이 되어 사흘 만에 빠져나온 사람입니다. 요나 예언자가 이렇게까지 하느님의 명을 거역했던 것은 비록 남북으로 갈라지긴 했지만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생각하는 증오를 초월하여 원수 같은 이방민족에게까지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니느웨 백성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지극한 경지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기적을 언급하면서 당신이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기적을 실현하겠다고 암시하십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완고하게 붙잡고 있는 낡은 사고방식에서 깨어나오지 않는다면 장차 그들이 깔보고 멸시한 이방인들에 의해 단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실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것은 마치 매주 주일을 경건하게 지키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각종 계명과 교리를 충실하게 행하는 크리스찬을 향해서 “심판의 날 당신들이 평소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비신자들이 심판대에 앉아 여러분을 판단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말을 들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황당하고 억울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면 왜 그들은 예수님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했으며, 지금 우리도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늘날 우리는 경전(Canon)으로 정리된 성경을 읽고, 교회의 전통이 알려주는 다양한 가르침에 의해 2000년 전 갈릴리 목수의 아들 나자렛 사람 예수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러한 것이 없었던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여러 예언자 중에 하나였고, 좋은 말씀을 전하고 때때로 병을 치유하는 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예수님 보다는 좀 더 자극적이고 강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기적들’을 요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현상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불러 일으킬 순 있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 완고한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뒤집을 만큼 깊은 내적인 기적, 회심으로 까지 인도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적은 ‘나’라는 존재가 변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원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사도 바울이 완전히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바로 진정한 ‘기적’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주님은 외부의 기적을 요구하기 이전에, 나 자신이 기적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각자가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기적’을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온갖 감정과 사고의 틀에 갇힌 우리에게 이러한 요청은 어쩌면 참으로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만이 우리의 감긴 눈을 뜨게 해 주시고, 굳어진 마음을 녹여 주시고, 닫힌 사고를 열어 주셔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기적’을 체험하게 하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을 온전히 변화시켜 주시는 ‘내적혁명’이 일어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모든 기적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 각자를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 교회를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 사회와 우리 나라를 변화시켜 주시는 그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투명한 일처리(루가8: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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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놓아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감추어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내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투명한 일 처리

 

예전에 선배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조직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선배는 “보고(報告)가 생명이다”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되돌아 보니, 그 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국가나 기업이나 심지어 교회마저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감추어 둔 것들이 드러나 세상에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모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서 오는 폐해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서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국가의 행정, 기업의 업무 그리고 교회의 사역 모두 등불과 같은 공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 빛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빛으로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일을 함에 있어서 투명하고 공정하고 감추지 않는 태도가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하는 공무원, 기업인, 종교인이 많아져서 우리사회가 더욱 빛나게 되길 기도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내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오늘의 기도: “참 빛이신 당신을 닮아 세상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하소서.”

인간의 규칙, 하느님의 법칙(루가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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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규칙, 하느님의 법칙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것 보다는 오래된 것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사회에 있는 많은 규칙들은 이러한 우리의 익숙함과 그에 따르는 편안함과 안전함에 근거해서 만들어 집니다. 만일 어떤 규칙이 이러한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담아 낸다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심지어 그 규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규칙이 단지 우리의 익숙함과 그에 따른 편안함만 따라 간다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 만든 규칙이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는 그것을 깨고 나와야만 하는 모순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생각할 때, 저는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서 언급한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다수가 추종하는 기존의 문명, 문화, 또는 어떤 규칙에 대하여 창조적 성향을 가진 소수가 도전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역사는 진보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수의 아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 서를 읽으시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께서 읽으신 성경구절의 맥락을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자신의 선조들이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귀환할 때 불렀던 환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로마와 헤로데의 압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대목을 들으면서도 아주 먼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이자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에 이미 익숙해져서 현 질서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기에 이사야 서의 그 말씀에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께서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반기를 드십니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도전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당돌한 선언에 내심 놀라기도 하고, 그분의 설교에 탄복하면서도 반발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이 말속에 담긴 의미는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고? 감히 로마제국과 헤로데가 정한 규칙에 도전을 하겠다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당신이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인데, 뭐가 잘 나서 그런 당돌한 말을 하는가?”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도전적 언사를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도전에 화가 난 사람들은 그분을 동네 산 벼랑으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의 도전에 마을사람들의 ‘응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길을 가십니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인간의 규칙이 금이 가기 시작하고, 이제 하느님의 법칙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선포하신 메시아 시대를 실현하시기 위해 그 발걸음을 떼신 것입니다.

현상에 매몰된 인간의 규칙이 예수님의 도전으로 하느님의 법칙을 구현하기 시작합니다. 그 법칙이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歷史(History)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役事(Works)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인간들이 정하고 안주하고 있는 규칙을 초극하고 당신의 법칙을 완성해 가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규칙에 안주하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법칙을 보여주시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단지 예수님만 가신 길이 아닙니다. 우리도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이 편안한 규칙에 젖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설사 불편하더라도 일어나서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만든 규칙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느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만이 나와 우리 모두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여는 이 아침 감사 성찬례를 통해 새 시대를 여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빌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율법학자의 관심, 예수님의 관심(마태22:34-40)

untitled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 왔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오 22:34-40)

율법학자의 관심, 예수님의 관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모든 계명의 근본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의를 제기할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에 있어서 예수님과 율법학자들 간에 왜 그리 커다란 차이가 생기는 걸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다가 예전에 고(故) 신해철씨가 방송에서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당신이 무슨 꿈을 이루는 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지 아닌 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신경을 쓰신다.”

세상에는 수많은 규칙, 법규, 계명들이 있고 그것의 준수여부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신앙도 겉으로 드러난 신분이나 규범준수 여부로 그 우열과 행복을 나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계명들을 준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관심은 우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느님 대하듯’ 성심 성의껏 하고 있는가 일 것입니다.

모든 일을 주님께 바치듯이 일하고, 모든 사람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 계명은 우리를 참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학자와 다른 예수님의 진정한 관심이자 의도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오늘의 기도: 만사를 주님께 바치듯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를 따르는 길(마태 16:24-28)

607가해 연중18주 금요일 (마태 16:24-28)

예수를 따르는 길

오늘은 아씨시의 클라라(Clara) 성녀 축일입니다. 클라라 성녀는 ‘제2의 프란시스(Alter Franciscus)’로 불릴 정도로 프란시스 성인이 추구한 청빈과 겸손의 영성을 철저히 추구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녀가 작성한 수도회 규칙은 여성이 최초로 작성한 규칙서로서 그리스도교 여성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세가지를 상기해 봅시다.

첫째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첫번째 조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십자가입니다. 흔히들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시편저자도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시편90:10)”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서도 인생의 고통과 무상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자에게 인생의 고해라는 십자가에 떠밀려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서라고 촉구하십니다.

둘째 말씀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예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 앞바다에서 결전을 앞두고서 부하들에게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는 비장한 말씀을 하시고, 마침내 승리를 일구어 내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도 굳은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 말씀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입니다. 이 말씀 이야말로 앞의 두 말씀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도, 주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내 목숨, 내 생명을 얻기 위함인 것입니다. 한글성경에는 ‘목숨’, 영어성경에는 ‘soul’, 중국어성경에는 ‘生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가리키는 바는 바로 참되고 대체불가능한 나의 본래 모습이자,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도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19:2)”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 희생을 한다는 것을 내가 남들보다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 남들 보다 손해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희생’을 뜻하는 영어단어 sacrifice의 라틴어 어원이 sacrum(성스러운) facere(만들다)라는 점을 안다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께 나를 바침으로써 나를 성스럽게 만드는 과정인 것입니다. 십자가없이 부활이 오지 않는 것처럼, 나를 성스럽게 만드는 희생없이 나는 주님처럼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을 걸을 때 나는 이 세상 어느 것 과도 대체 불가능한 생명, 영혼, 목숨을 얻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유일한 길이요,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만 국한되질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 가정을 살리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을 희생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가정도 삽니다. 우리 교회를 살리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을 희생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우리사회를 살리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을 희생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사회도 삽니다. 이처럼 희생이라는 과정은 나와 내 주변을 성스럽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희생과 헌신이 나를,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그리고 우리사회를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물론, 이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게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 “아버지!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르14:36)”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성서는 그 때 성부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힘을 북돋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루가22:43-44 참조) 마찬가지로 우리가 희생과 십자가를 감당키 어려워 힘들어 할 때, 주님은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청빈과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성 클라라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길입니다. 오직 그 길만이 나와 가정, 교회와 사회를 거룩하게 하는 길이요, 생명을 잃지않게 하는 길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연약한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셔서 우리에게 맡겨진 이 길을 잘 감당하고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