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르 1:14-20)20180108

images7BR67HUW나해 연중 1 주간 월요일(사무엘 상 1:1-8 / 시편 116:11-15 / 마르 1:14-20)

우리말에 ‘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떠한 시기 혹은 기간이라는 뜻도 있고, 적절한 혹은 적합한 시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컨대, “When I was young(내가 젊었을 때)”에서 ‘때’란 전자의 의미이고, “There is a right time for everything(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의 ‘때’란 후자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 두가지 종류의 ‘때’가 있습니다. 오늘 들은 독서 사무엘 상권을 보면 엘카나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중 한나는 자식이 없어서 자식이 있는 브닌나에게 멸시를 당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여인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청난 불이익과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심지어 소박을 맞고 쫓겨날 정도로 존재자체의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남편 엘카나가 아무리 아내 한나를 사랑하고 위로해 준다고 한들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참으로 한나에게 고통스러운 시기요, 괴로운 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시편 116장 11절은 이러한 고통의 때를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하도 심할 때에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한나와 시편저자처럼 우리는 모두 실존적으로 고통스런 ‘때’를 겪었고, 겪고 있고, 겪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외면당하고, 잊혀지고 그래서 이 고통에 대해 하소연하고 구해 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해 보지만 만일 하느님이 아무런 대답도, 어떠한 위로도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저 역시 이러한 때를 당하면 ‘인내(忍耐)’, ‘인고(忍苦)’라는 말 외에는 달리 견뎌낼 뾰족한 길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서운 비바람을 맞으며 걸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때’는 어떠한 기간만을 뜻하는 고정된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전환의 시간, 변화의 분기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때를 감지할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맞이할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 1장 1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우리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 있을 때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려 봐도 응답 받지 못할 때라도 하느님은 우리가 모르지만 그 변화의 때를 예비해 두십니다. 그리고 때가 다 되었다, 때가 다 찼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회개란 어쩌면 하느님의 이 선언을 듣고 절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달리 표현하면 ‘응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네 명의 어부-시몬, 안드레,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회개와 응답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1: 17)”고 말씀하시자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이 응답은 그들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전환의 순간이요, 변화의 때였습니다. 이 때를 계기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때’는 이처럼 우리 인생의 길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때’에 있습니까? 한나와 시편저자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시고 계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4명의 어부들처럼 변화와 전환의 때에 서 계십니까? 만일 전자라면 힘들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실 그 때를 기다리며 인내의 은총을 간구하며 이겨내 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만약 후자라면 그것이 진정 하느님의 부르심 인지 아니면 여러분 욕망에서 나오는 건지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분별의 은총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되든지 우리 신앙인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라는 믿음입니다. 임마누엘을 믿을 때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 중에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날 지라도 함께 계실 것이며, 우리가 기쁨 중에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실 것이며, 변화와 선택의 때에 올바른 길로 불러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때’의 주관자이신 임마누엘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중국사역을 마감하면서(20171207)

201006 004예레 1:4-12 / 시편 42:1-5 / 루가 19:29-40

중국 사역을 마감하면서

짧게는 2010년부터 2016년 초까지, 길게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중국사역을 마무리하며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신부님과 교우님들과 감사성찬례를 봉헌하게 되어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감사성찬례에 봉독 할 성경말씀을 고르면서 그 동안 겪어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2000년 6월 15일 신대원생 시절 저는 평양 순안공항에서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을 보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대해서 기도할 때 저는 ‘중국’이란 단어를 떠올랐고, 마침 그 무렵 방통대 중문과를 다니던 제 아내가 중국에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해서 속으로 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그 일이 있고나서 저는 중국과 중국교회에 대해 알면 이북과 장차 이북선교를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중국사역은 이렇게 해서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르심 받았을 때처럼 아이와 같은 상태였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져온 어린 나귀 와도 같았습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러기에 그런 모험을 감히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그 후, 정철범 주교님께서 우리 교단에 중국전문가가 필요하니 공부하라는 명을 주셨고, 마침 예수사랑선교회에서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와 봉헌금을 전해 주신 덕분에, 대한성공회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선교자금이 아닌 순수 국내 신도들의 헌금으로 해외유학을 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정철범 주교님과 예수사랑 선교회 신부님과 교우님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06년에 귀국하여, 저는 광명, 대성당, 간석교회와 신월동 지역아동센터 그리고 나눔과 평화재단에서 시무하면서 부제와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중국 남경에 있는 국가 급 신학교에 교수요원으로 성공회 성직자를 보내기로 영국성공회가 중국교회가 합의하였고, 이 일로 교회선교회(CMS) 서울 사무소에서 면담을 하였는데 저는 여기에 자원하였습니다. 이 때 서울사무소 소장이신 나성권 신부님께서 이 일이 성사되도록 많은 애를 써 주셨습니다. 그리고 박경조 주교님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러가지 이유로 이 일을 결국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09년 김근상 주교님 때, 영국CMS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성 중 하나인 귀주성 신학교에 파송하는 걸로 서울교구와 협의했지만 서울교구의 의지부족으로 이것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합법적으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모든 경로가 막히게 되었고, 저는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라고 여기고 생각을 접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신자가정의 기도와 후원으로 극적인 계기가 마련되었고, 이 보고를 들으시고 주교님이 이 선교자금으로 갈 수 있다고 여기시고 허락해 주셔서 다시 중국선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2010년 3월 저희 세 식구가 중국 천진 땅을 밟았을 때,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저는 우선 여기서 뿌리내리기 위해 여러 대학의 문을 두드렸고, 다행히 천진사범대학과 천진상무학원에서 교편을 잡게 되어서 비자문제 해결과 약간의 경제적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중국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신문사 특파원도 하고, 대학교재도 출판하고 때로 중국에 진출하려는 한국의 중소기업들의 통역사도 하다가 나중에는 그들을 위한 컨설팅도 하게 되는 등, 여러가지 사회경험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낯선 땅에서 교회라는 제도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저를 훈련시키시고 폭넓은 안목과 인생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시편말씀처럼 저는 한편으론 낙심과 불안과 고독으로 심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제로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보장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한국의 교회 와도 마치 잊혀진 존재처럼 되었다는 점이 저를 우울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물질적으론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나 영적으론 사막과도 같은 곳이라고 여기던 중국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중국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는 교회지만 신자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그 중에는 우리 성공회 전례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중국 목회자 그룹도 생기게 되었고, 실제로 이들은 자생적으로 자신들의 교회에서 성공회 전례를 거행하고, 성공회 기도서를 편찬하고, 다른 지역 목회자들과 신도들에게 알리고 교육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중국인구규모와 문화혁명 기간 중 극심한 박해를 이겨낸 중국인 신자들의 저력으로 볼 때, 장차 중국교회는 아시아의 그리스도교를 선도하는 맏형으로 우뚝 솟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16년 저는 오랜 중국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까지 올 여름 귀국해서 중국에서의 사역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교구의 교육훈련국과 선교국을 책임 맡고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구는 지금 참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누적된 과거의 관행과 변화된 사회환경으로 교회의 사목은 예전보다 훨씬 힘들게 되었습니다. 다시 교회를 새롭게 재건해야 될 시점입니다.

교구에서 일하면서 저는 종종 주님께 묻습니다: “저를 여기로 오게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저는 아이라서 이 힘든 일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입니다.”

그럴 때마다 루가 복음의 말씀, “주께서 쓰시겠답니다”와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중국사역을 마감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 교회를 위해 주님께서 하시려는 것이 어떤 건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아이 와도 같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나귀가 되어 주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신 고통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처럼 영광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는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우리의 본성은 고통보다 영광을 원하지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선 고통이라는 인내의 시간을 잘 견뎌내야 할 것입니다.

이 감사성찬례가 하나의 매듭을 짓는 자리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순례의 여정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이 순례의 여정은 우리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전쟁의 공포가 어느 때 보다 높은 한반도에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주님의 깊은 섭리로 가는 여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중국사역을 위해 기도와 후원을 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 사역을 기획하시고 이끄시고 우리를 한데 불러 모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성가>

입당 406 / 봉헌 498 / 파송 411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루가 14:25-33/로마13:8-10)

intentional-discipleship가해 연중 31주 수요일 (로마 13:8-10 / 루가 14:25-33)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 교회는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성공회 형제자매 교회 간의 상통과 일치를 위한 4가지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세계 성공회 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 약칭: ACC)’가 있습니다. ACC는 주교, 사제,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공회 내외적으로 직면하는 다양한 사안들에 대하여 함께 모여 논의하고 연구하고 조언해주는 곳입니다. 2016년 ACC에서 ‘제자도와 제자삼기(Intentional Discipleship and Disciple-Making)’란 제목으로 공식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문서는 성공회 신자가 단지 ‘신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되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올해 10월 한국의 3개 교구 주교님들이 참석하신 미얀마에서 열린 ‘동아시아 성공회 주교회의’에서도 세계 성공회가 정한 핵심 방향인 ‘제자도’에 대하여 진지한 토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믿는 이들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온 선교구호가 아닙니다. 이것의 근원은 예수님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해선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것도 3차례에 걸쳐 강조하십니다. 첫번째 강조구절은 2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표현에 대하여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 히브리어 특성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겠습니다. 히브리어와 예수님이 사용하셨다는 갈릴리 지방어인 아람어에서는 비교급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자신을 미워하라’는 표현은 진짜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자기 혈육이나 자신을 더 사랑한다면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두번째는 27절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세번째는 33절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자기자신을 덜 사랑하라”, “자기 십자가를 져라”, “자기가 가진 것을 버려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이 모든 말씀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小我를 벗어나서 大我로 나아가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참된 나, 하느님과 일치된 나, 세상만물과 하나된 내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비롯해 내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물건이나 사람들 속에 갇혀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십계명과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단지 계명준수라는 소극적인 실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9-10) 그렇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마침표이자 완성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듯이,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신중히 숙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창피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 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하고 비웃을 것이다.”(루가14:29-30)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고민에 빠집니다. 세례 받아 이미 신자가 된 우리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이제 어찌해야 되나? 그분을 따르자니 어렵고, 따르지 않자니 큰 일이고…… 참으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우리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울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성부께 간절히 기도 드리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도 함께 해 주십니다. 요한복음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두시고 다음과 같이 격려해 주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 33)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나에게 부과되는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하는 자기희생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증오와 미움과 질투와 복수는 어떤 의미에선 삶에 에너지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나와 모두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오직 사랑만이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가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의 길을 함께 걷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협조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며 하루를 여시길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untitled가해 연중 28주 월요일 (로마 1:1-7 / 루가 11:29-32)

기적”을 볼 수 있는 안목

오늘 들은 제1독서는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의 첫 부분 인사말입니다. 로마서는 신약성서 배열순서 상 가장 먼저 온 첫째 서간이고 제일 길고 신학적인 내용도 가장 풍부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활동이 원숙한 말년에 써서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는 로마서 앞머리에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부르심 받은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유대인 안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 에게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갈릴리와 유다라는 제국의 변방이 아닌,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서 말입니다. 실로 기적과도 같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도 ‘기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 뭔가 기이하고 신기한 일들을 일으켜 주길 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요나의 기적 밖에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루가11:30)고 탄식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요나는 당시 북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뜨린 아시리아 왕국의 수도 니느웨 백성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다가 고래 밥이 되어 사흘 만에 빠져나온 사람입니다. 요나 예언자가 이렇게까지 하느님의 명을 거역했던 것은 비록 남북으로 갈라지긴 했지만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생각하는 증오를 초월하여 원수 같은 이방민족에게까지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니느웨 백성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지극한 경지를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기적을 언급하면서 당신이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기적을 실현하겠다고 암시하십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완고하게 붙잡고 있는 낡은 사고방식에서 깨어나오지 않는다면 장차 그들이 깔보고 멸시한 이방인들에 의해 단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실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것은 마치 매주 주일을 경건하게 지키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각종 계명과 교리를 충실하게 행하는 크리스찬을 향해서 “심판의 날 당신들이 평소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비신자들이 심판대에 앉아 여러분을 판단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말을 들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황당하고 억울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면 왜 그들은 예수님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했으며, 지금 우리도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오늘날 우리는 경전(Canon)으로 정리된 성경을 읽고, 교회의 전통이 알려주는 다양한 가르침에 의해 2000년 전 갈릴리 목수의 아들 나자렛 사람 예수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러한 것이 없었던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여러 예언자 중에 하나였고, 좋은 말씀을 전하고 때때로 병을 치유하는 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예수님 보다는 좀 더 자극적이고 강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기적들’을 요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적현상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불러 일으킬 순 있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 완고한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뒤집을 만큼 깊은 내적인 기적, 회심으로 까지 인도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적은 ‘나’라는 존재가 변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원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사도 바울이 완전히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 바로 진정한 ‘기적’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주님은 외부의 기적을 요구하기 이전에, 나 자신이 기적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각자가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기적’을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온갖 감정과 사고의 틀에 갇힌 우리에게 이러한 요청은 어쩌면 참으로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만이 우리의 감긴 눈을 뜨게 해 주시고, 굳어진 마음을 녹여 주시고, 닫힌 사고를 열어 주셔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기적’을 체험하게 하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을 온전히 변화시켜 주시는 ‘내적혁명’이 일어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모든 기적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 각자를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 교회를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 사회와 우리 나라를 변화시켜 주시는 그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의 규칙, 하느님의 법칙(루가4:16-30)

imagesEFJAA8D7가해 연중22주 월요일 (루가 4:16-30)

인간의 규칙, 하느님의 법칙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것 보다는 오래된 것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사회에 있는 많은 규칙들은 이러한 우리의 익숙함과 그에 따르는 편안함과 안전함에 근거해서 만들어 집니다. 만일 어떤 규칙이 이러한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담아 낸다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심지어 그 규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규칙이 단지 우리의 익숙함과 그에 따른 편안함만 따라 간다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 만든 규칙이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는 그것을 깨고 나와야만 하는 모순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생각할 때, 저는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서 언급한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다수가 추종하는 기존의 문명, 문화, 또는 어떤 규칙에 대하여 창조적 성향을 가진 소수가 도전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역사는 진보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수의 아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 서를 읽으시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께서 읽으신 성경구절의 맥락을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자신의 선조들이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귀환할 때 불렀던 환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로마와 헤로데의 압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대목을 들으면서도 아주 먼 옛날의 아름다운 추억이자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에 이미 익숙해져서 현 질서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기에 이사야 서의 그 말씀에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께서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반기를 드십니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도전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당돌한 선언에 내심 놀라기도 하고, 그분의 설교에 탄복하면서도 반발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이 말속에 담긴 의미는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요? –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고? 감히 로마제국과 헤로데가 정한 규칙에 도전을 하겠다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당신이나 우리나 별반 차이가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인데, 뭐가 잘 나서 그런 당돌한 말을 하는가?”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도전적 언사를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도전에 화가 난 사람들은 그분을 동네 산 벼랑으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의 도전에 마을사람들의 ‘응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길을 가십니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인간의 규칙이 금이 가기 시작하고, 이제 하느님의 법칙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선포하신 메시아 시대를 실현하시기 위해 그 발걸음을 떼신 것입니다.

현상에 매몰된 인간의 규칙이 예수님의 도전으로 하느님의 법칙을 구현하기 시작합니다. 그 법칙이란 바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歷史(History)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役事(Works)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인간들이 정하고 안주하고 있는 규칙을 초극하고 당신의 법칙을 완성해 가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규칙에 안주하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법칙을 보여주시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단지 예수님만 가신 길이 아닙니다. 우리도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이 편안한 규칙에 젖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설사 불편하더라도 일어나서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 만든 규칙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느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만이 나와 우리 모두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여는 이 아침 감사 성찬례를 통해 새 시대를 여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빌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인생의 바닥에서 일어난 반전(反轉)들

가해 연중 14주 월요일(20170710)

창세28:10-22 / 마태9:18-26images

인생의 바닥에서 일어난 반전(反轉)들

일년이 春夏秋冬 사계절로 이루어지듯이, 우리 인간도 어린이-청년-장년-노년이라는 4계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육신 뿐만 아니라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변화의 폭이 그리 크지 않은 비교 적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 폭이 참으로 드라마틱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 식구, 나와 친한 사람들이 되도록이면 덜 고생하고 비교적 기복이 적은 안정되고 평온한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런 바램과는 달리 인생의 길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인생의 바닥을 맛보며 절망하기도 하고, 다시 일어설 희망과 용기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극적인 반전을 한 4명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 복음에서 회당장과 죽은 그의 딸, 그리고 오랫동안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가장 어려운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난 반전 이야기입니다.

먼저, 야곱입니다. 오늘날은 많이 약해졌지만, 예전에는 큰 아들에 대한 우선권은 대단했습니다. 더욱이 고대에는 장자의 경우, 모든 집안의 재산과 권리를 승계하는 막강한 부와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여인을 사랑한 큰 아들 에사오를 어머니 리브가가 보기에 영 탐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야곱에게 가문의 정통성을 잇게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나 에사오는 분노했고, 동생 야곱은 형의 노여움을 피해 무작정 도망쳐야 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뿌리가 뽑힌 사람이고, 아무나 그를 해쳐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짐승과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버림받은 야곱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꿈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의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의 이사악의 하느님이다(창세 28,13)”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서 뿌리 뽑혀 나간 야곱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새롭게 이어 주십니다. 야곱의 조상들이 섬겨왔던 하느님께서 직접 그를 복권 시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야곱의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 주고 생명의 근거가 되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추방선고를 뒤집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반전 선언입니다.

다음으로 복음을 봅시다. 하혈병을 12년이나 앓았다는 것은 당시 수명이 60년이라고 했을 때, 인생의 1/5을 병 중에 시달렸다는 의미입니다. 그 긴 세월 중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녀에게 예수님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슬쩍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 9:22)” 오랜 병으로 심신이 망가진 그녀는 주님의 이 한 말씀으로 영육이 회복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당장과 그의 딸을 봅시다. 예수님이 도착하자 딸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대단하시다 한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장난 속에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자 소녀는 곧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놀라운 반전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성서의 인물들처럼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병으로 앓기도 하고, 여러가지 스트레스로 마음과 영혼이 지쳐 있기도 합니다. 참으로 막막하고, 힘들고, 죽을 것만 갔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을 믿고, 의지합시다. 주님은 야곱처럼 우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때 오셔서 꿈과 희망을 주시고, 다시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혈병 앓는 여인처럼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는 힘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제 다 끝났어”라는 절망의 한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은 다가 오셔서 우리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요, 이것의 인생을 사는 반전의 맛일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야곱처럼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창세 28:16)”하고 깨닫는 감탄사를 연발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이러한 주님의 은총을 깨닫고, 주님께 감사 드리고, 나아가 우리도 주님을 닮아서 불안과 낙담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 주님의 사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령: 선교적 영성의 원천(부활6주 월요일)

thessaloniki31부활6주 월요일

(사도 16:11-15 / 요한 15:26-16:4)

성령: 선교적 영성의 원천

여러분은 기도 중에 환시나 환상, 영상 혹은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있었다면 어떠한 상황 하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나요?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행전은 바울 일행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첫번째 선교열매인 옷감장수 리디아와 그의 가족에게 예수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앞 대목은 바울의 선교 아니 기독교 선교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 지역, 지금으로 말하자면 터키의 소아시아 지역 선교가 난관에 봉착하자 기도 중에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환시를 본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영상’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영어성경에는 ‘vision’, 중국어 성경에는 ‘异象’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기도 중에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啓示(Revelation)’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에는 크게 3차례에 걸쳐 성령의 계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세찬 바람소리와 불 모양으로 내려오셨고(사도 2장 참조), 두번째는 이방인 고르넬리오와 사도 베드로에게 기도 중에 각각 환시를 보여주시며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으며(사도 9장 참조), 세번째는 바울일행에게 유럽으로 건너오라는 환시를 보여 주셔서 유럽선교의 첫 문이 열리게 된 것(사도 16장 참조)입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선교의 고비고비마다 비전을 보여주시며 새로운 길로 안내해 주셨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협조자이신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협조자 성령은 우리를 당신의 증인이 되도록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해 주실 거라고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성령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선교의 원천이자, 영성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의 기도와 선교적 활동은 하나가 됩니다. 이제 기도는 더 이상 기도에서 멈추질 않고, 선교적 활동으로 연결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선교적 활동도 방향을 잃고서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로 올바른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 기도와 선교를 연결시켜 주시는 성령의 활동은 예수님과 사도행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선교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션(Mission)’이란 영화와 그 주제곡에 가사를 실은 노래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선교사들은 기도 중에 환상(Fantasia)을 보고 그 환상을 ‘축소지(Reduction)’라는 이상적 선교 공동체 마을로 실현시켰습니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있는 축소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인류유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교사들의 꿈과 열정이 담겨있는 선교유산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령은 기도 중에 비전과 환상으로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를 ‘하느님 선교(Missio Dei)’의 일꾼으로 불러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부르심(Calling)에 응답합니다. 성령은 베드로와 고르넬리오를 부르셔서 만나게 해 주시고, 사도 바울을 부르셔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깊고 푸른 바다를 건너 유럽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대서양을 건너 남미의 원주민들이 이상적 선교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성령의 Calling, 성령의 Vision, 성령의 Fantasia를 불어넣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3가지 요소가 서로 결합되어 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3가지 요소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상황입니다. 오늘 들은 독서를 보면 바울일행이 계획했던 소아시아 선교가 가로막히게 됩니다. 또한 ‘미션’이란 영화의 배경을 보면, 종교개혁으로 유럽이 혼란에 빠지면서 교회의 선교정신이 퇴색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측과 행동이 벽에 부딪혔을 때를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오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고 성령께 마음을 열고 길을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선교사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비전을, 판타지아를 봤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실천과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이 리디아를, 선교사들이 남미 원주민들에 기쁜소식을 전하면서 교회라는 열매가 맺어집니다.

제 개인 삶을 되돌이켜 볼 때, 성령께서는 제가 가려는 길이 막히고 기도 중에 그 길을 물을 때, 비전을 보여주시고 실행할 수 있는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결실을 맺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그러한 것을 체험하셨다면, 주님께 감사 드리고 찬양을 드리십시오. 그러나 아직 체험하지 못하셨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늘 여러분 곁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기만 하다면 그것은 들려지고, 보여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지금까지 해오던 우리의 패턴을 잠시 내려놓고 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하면, 성령께서는 새로운 비전, 새로운 판타지아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에 응답하고 실행한다면 바울이 유럽선교에 첫발을 딛고, 선교사들이 남미선교에 첫발을 디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새로운 선교지평이 열릴 것을 믿고 희망합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에 새로운 비전, 새로운 판타지아를 보여 주시길 희망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감각적 신앙(루가24:35-48)

untitled4월 20일 설교문

사도3:11-26 / 시편 8 / 루가24:35-48

감각적 신앙

그리스도교 영성에는 여러가지 기도방식이 있는데 그 중 ‘관상(contemplation)’이란 기도방법이 있습니다. 이 관상기도에는 크게 두 가지 기도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치 선(禪)불교처럼 무념무상을 목표로 자신을 비워 나가 하느님의 신비에 도달하는 관상 전통인데, 흔히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관상 전통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이 저술한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은 상상력을 활용하는 기도훈련을 가장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입니다. 이러한 상상력을 동원한 관상 중에 ‘오감묵상(五感默想)’이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다섯가지 감각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사용하여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고 그 분과 더욱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을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오감묵상을 활용하여 예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훌륭한 기도 소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놀랍고 무서워서 안절부절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만져 보아라.”하시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고 합니다. (24:37-43 참조)

우리는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순 없지만, 관상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상력을 통하여 특별히, 오감을 활용하여 예수님의 손과 발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만지고’, 그 분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잡수시는 구운 생선 냄새를 ‘맡고’, 그 분과 함께 생선을 먹으면서 그 맛을 ‘음미’해 봅니다. 이러한 관상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내가 시간을 초월하여 예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은총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나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어 봅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24:45) 당신의 구원 신비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마침내 복음의 증인으로 파견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이러한 관상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성경 속 문자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내 영혼 심지어 내 오감을 통해 내 몸에까지 스며듭니다. 그리하여 나 역시 그분의 제자가 되고, 그분의 사도가 됩니다. 이처럼 관상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하고, 하느님과 나를 더욱 인격적 관계로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기도가 주는 신앙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비록 예수님 시대 사람들처럼 그 분을 감각적으로 접할 순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관상 속에 오감으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함께 먹고, 만질’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활자 안에 갇힌 존재, 우리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추리되고, 생각되고 심지어 연구되는 존재가 아니라 생생하게 감각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되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토마사도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기까지 우리는 참으로 많은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교회의 전례와 성사를 통해서, 사제들의 설교와 신자들의 신앙간증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조금씩 그분을 알아갑니다. 오늘 제가 소개한 감각적 관상 역시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시는 여정에 좋은 영적 길잡이가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 주님과 당신 만이 만날 수 있는 공간에서 관상할 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시고, 당신의 소리를 들으시며, 당신의 체취를 맡으시고, 당신을 어루만지시며, 마침내 당신과 함께 생명의 양식을 맛보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간절한 믿음(요한4:43-54)

untitled가해 사순 4주간 월요일

(이사65:17-21 / 시편30:1-5, 8, 11-12 / 요한4:43-54)

여러분은 상대방이 하는 말만으로도 믿습니까, 아니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믿습니까? 아마도 저를 포함한 여기 있는 대부분 사람들은 前者가 아닌 後者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보고서 믿는 것보다 들어서 믿는 것이 더 성숙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20:29 참조)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차원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고향인 갈릴래아로 왔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야기의 배경장소인 가나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그 첫 기적이란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성서는 제자들이 포도주의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 2:11 참조)

이처럼 보고서 믿는 것은 제자들이나 갈릴래아 고향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종교예식을 지키기 위하여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봤던 고향사람들은 그제서야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일행이 고향에 도착하시자 환영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봤던 뭔가 신기한 일이나 기적들을 이 곳에서도 보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적 절박감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변화를 갈망하기 보다는 그저 새롭고 놀라운 뭔 가에 흥미와 기대를 가질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이제 실존적 간절함을 가지고 한 사람이 예수님께 옵니다. 그는 그 지방 고위관리였습니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이 고관이 이스라엘 사람인지 이방인인지 언급하고 있질 않으나, 다른 복음서에는 이방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건 이방인이건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고관이 매우 급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다 죽게 되자 예수님을 어서 모시고가서 아들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애원합니다: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주십시오.”(요한 4:49)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와 함께 가시질 않고 “집에 돌아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하고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성서는 이 순간을 너무도 간단히 증언하는 바람에 우리는 고관의 내면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의 마음은 실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와 다른 예수님의 반응에 대한 당황스러움, 그 분의 말만 믿고 과연 돌아가도 좋은 건지 하는 의심,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는가 하는 체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 말씀을 믿고 따라가 보자 하는 마음 등등.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마중 나온 종들로부터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시간을 물어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기적은 그가 말씀을 들은 바로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그 들음은 그저 그의 귀에 들린 소리나 음성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서 받아들인 ‘들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외형적으로 돋보이는 신기한 기적은 신앙의 참된 동기가 될 수 없으며,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만이 신앙의 참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갈릴래아 가나에서 예수님과 만난 고관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신앙의 참된 가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시대 사람처럼 그 분을 물리적으로 볼 수도 없고, 기적을 직접 목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서의 말씀과 믿음의 조상들이 전해 준 증언을 듣고 믿을 뿐입니다. 보는 믿음보다 듣는 믿음이 더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수시대 사람들처럼 뭔가 신기한 기적이나 이적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뭔가를 보고서야 믿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 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좀 더 높은 우리의 태도를 요구하지만, 사실 보고서 믿거나 혹은 들어서 믿거나 모두 우리를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아무리 좋은 것을 들어도 오늘 들은 고관처럼 간절함이 있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그 간절함이란 바로 우리의 태도이며 지향입니다. 내가 참으로 변화되길 갈망하고, 나의 실존적 간절함이 담겨있지 않으면, 아무리 기적이나 신기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참으로 변화시켜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해 달라고 간청한 고관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속한 곳이 다시 새로워 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참다운 단식(2017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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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58:1-9 / 시편 51:1-4, 16-18 / 마태 9:14-15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단식은 경건의 상징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18장 12절에 보면 성전에서 바리사이파 사람이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칩니다”라며 기도한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 이유는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다고 여기는 목요일과 율법을 받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여기는 월요일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율법은 유대력으로 7월 10일, 즉 속죄일에만 단식하라고 하였습니다. 레위기 23장 27절은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하고 있습니다: “칠월 십 일은 죄 벗는 날이다. 그 날에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단식하며 야훼께 제물을 살라 바쳐야 한다.” 그러던 것이 바빌론 포로 이후에는 1년에 4번-4월, 5월, 7월, 10월-이나 단식하는 날이 생겼고(즈가리야 8:19 참조), 그 후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이 정한 것보다 횟수를 늘려 자주 단식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경건하고 열심한 사람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기득권을 계속해서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출애굽을 통해 해방의 기쁨을 기억하고 사람들을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단식이 세월이 흐르면서 경건함과 불경함을 판단하고, 차별과 특권을 가져오는 ‘전통’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보여주기 식 단식을 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보아 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 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이사 58:3)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 모두는 곡기를 끊는 단식(斷食)이라는 결핍된 행위를 통해, 이보다 더 큰 하느님의 보상이나 응답을 원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적어도 사람들로부터 경건하고 열심하다는 보상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닌가요?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말 속에 이러한 우리 내면에 잠재된 보상심리가 은연 중에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참다운 단식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참다운 단식의 내적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 앞에서 내 실존이 죄인이라는 처절한 자각입니다. 시편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이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 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시편 51:3-4)

그렇습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느님 면전에서 내가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뼈에 사무치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는 상대성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깨달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나는 시편저자처럼 하느님을 향해 다음과 같이 자비와 용서, 그리고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 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는 얕보지 아니하시니, 어지신 마음으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의 성벽을 다시 쌓게 하소서.”(시편 51:17-18)

이처럼 단식은 하느님 앞에서 내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는 것이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나를 회복시켜 주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식을 통해서 나는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단식만이 나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웃을 해방시킬 수 있는 내적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단식을 하는 사람은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다”(이사 58:6-7)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 참다운 단식을 통해 거듭 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을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고, 상처를 금시 아물게 하시며,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할 때, 야훼의 영광이 여러분의 뒤를 받쳐 주시길”(이사 58:8 참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