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학자의 관심, 예수님의 관심(마태22:34-40)

untitled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 왔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오 22:34-40)

율법학자의 관심, 예수님의 관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모든 계명의 근본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의를 제기할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에 있어서 예수님과 율법학자들 간에 왜 그리 커다란 차이가 생기는 걸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다가 예전에 고(故) 신해철씨가 방송에서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당신이 무슨 꿈을 이루는 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지 아닌 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신경을 쓰신다.”

세상에는 수많은 규칙, 법규, 계명들이 있고 그것의 준수여부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신앙도 겉으로 드러난 신분이나 규범준수 여부로 그 우열과 행복을 나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계명들을 준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관심은 우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느님 대하듯’ 성심 성의껏 하고 있는가 일 것입니다.

모든 일을 주님께 바치듯이 일하고, 모든 사람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 계명은 우리를 참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학자와 다른 예수님의 진정한 관심이자 의도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오늘의 기도: 만사를 주님께 바치듯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를 따르는 길(마태 16:24-28)

607가해 연중18주 금요일 (마태 16:24-28)

예수를 따르는 길

오늘은 아씨시의 클라라(Clara) 성녀 축일입니다. 클라라 성녀는 ‘제2의 프란시스(Alter Franciscus)’로 불릴 정도로 프란시스 성인이 추구한 청빈과 겸손의 영성을 철저히 추구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녀가 작성한 수도회 규칙은 여성이 최초로 작성한 규칙서로서 그리스도교 여성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 세가지를 상기해 봅시다.

첫째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첫번째 조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십자가입니다. 흔히들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시편저자도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시편90:10)”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서도 인생의 고통과 무상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자에게 인생의 고해라는 십자가에 떠밀려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서라고 촉구하십니다.

둘째 말씀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예수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 앞바다에서 결전을 앞두고서 부하들에게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는 비장한 말씀을 하시고, 마침내 승리를 일구어 내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도 굳은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번째 말씀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입니다. 이 말씀 이야말로 앞의 두 말씀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도, 주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내 목숨, 내 생명을 얻기 위함인 것입니다. 한글성경에는 ‘목숨’, 영어성경에는 ‘soul’, 중국어성경에는 ‘生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가리키는 바는 바로 참되고 대체불가능한 나의 본래 모습이자,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도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19:2)”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 희생을 한다는 것을 내가 남들보다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 남들 보다 손해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희생’을 뜻하는 영어단어 sacrifice의 라틴어 어원이 sacrum(성스러운) facere(만들다)라는 점을 안다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께 나를 바침으로써 나를 성스럽게 만드는 과정인 것입니다. 십자가없이 부활이 오지 않는 것처럼, 나를 성스럽게 만드는 희생없이 나는 주님처럼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을 걸을 때 나는 이 세상 어느 것 과도 대체 불가능한 생명, 영혼, 목숨을 얻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유일한 길이요,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만 국한되질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 가정을 살리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을 희생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가정도 삽니다. 우리 교회를 살리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을 희생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우리사회를 살리고 싶습니까? 그러려면 여러분을 희생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사회도 삽니다. 이처럼 희생이라는 과정은 나와 내 주변을 성스럽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희생과 헌신이 나를,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그리고 우리사회를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물론, 이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게세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 “아버지!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르14:36)”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성서는 그 때 성부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힘을 북돋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루가22:43-44 참조) 마찬가지로 우리가 희생과 십자가를 감당키 어려워 힘들어 할 때, 주님은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청빈과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신 성 클라라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길입니다. 오직 그 길만이 나와 가정, 교회와 사회를 거룩하게 하는 길이요, 생명을 잃지않게 하는 길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합시다. 연약한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셔서 우리에게 맡겨진 이 길을 잘 감당하고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피터버러교구 방문기(20170722 성공회신문)

오래된 교회의 열정과 활기

이경래 베드로 사제(서울교구 교육훈련국&선교국)

영국 피터버러 교구는 서울교구의 자매교구이다. 서울교구는 피터버러 교구에서 하고 있는 평신도 사역자 양성 모델을 배워서 현재 세실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6월13일부터 19일까지 필자를 포함하여 서울, 대전, 부산교구 소속 4명의 사제들이 방문하였다. 특별히 이번 출장은 피터버러 교구가 실행하고 있는 성직자 인사와 지속교육, 사목과 새로운 선교활동, 평신도 사역자 양성, 청년사목, 교구행정 등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를 목적을 하였다. 그 중 몇가지 점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교구행정에 대하여

피터버러 교구 행정센터는 두 곳이다. 피터버러 대성당 옆에 있는 곳은 우리의 교무국에 해당하는데, 주로 재정과 재무, 인사를 비롯한 행정일반 업무를 관장하고 있으며, 노스햄턴 시에 있는 곳은 우리의 교육훈련국과 선교국에 해당하는데, 여기서 평신도 훈련, 사제의 지속적 양성 프로그램 개발, 새로운 선교전략 기획과 실행 등을 관장하고 있다. 그리고 두 곳의 교구행정 기능을 책임지는 총감사제(archdeacon)가 있어서 교구장 도널드 주교와 존 보좌주교의 사목방침을 실행하고 있다. 특별히, 노스햄턴에 있는 교구센터에서 우리는 교구의 다양한 사목과 선교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매 세션마다 평신도 사역, 사제 지속교육, 새로운 선교를 비롯해 교회관리 및 인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을 조정하는 부서까지 실로 영역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사제와 신자들이 와서 자신들의 업무를 설명하였다. 현재 한 두 사람이 위의 업무를 다 해야 하는 우리 실정에서 볼 때, 참으로 부러우면서도 우리도 이러한 인적▪물적 기반을 어떻게 확보하고 우리 상황에 적합한 교구행정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구축해야 할 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2. 교회 활성화를 위한 평신도 사역자 양성에 대하여

서울교구 세실대학이 모델로 삼고 있는 피터버러 교구의 평신도 사역자 양성의 특징은 소정의 과정을 이수한 신자들에게 주교가 보증하는 라이선스를 수여하는 점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시작하기 전에 일종의 ‘공동합의서(working agreement)’를 작성한다. 그리고 이것을 매년 검토하고 갱신하고 있다. 특히, 평신도 사역자는 사제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제와 신자 사역자들과 팀을 이루어서 교회를 활성화하고 있다고 한다.

3. 성장을 위한 선교전략

피터버러 교구는 두개의 선교 트랙을 갖고 있다. 하나는 교회 내적인 선교전략으로 ‘GAP(Growth Action Plans)’이라는 틀을 가지고 각 교회 마다 5년, 1년 목표를 정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진단하면서 성장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 외적인 선교전략으로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 of Church)’을 실행하면서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고 있다. 현재 현재 서울교구 선교국과 연결된 브렌든 선교연구소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4. 성직자 지속교육 시스템

피터버러 교구의 성직자 돌봄 과정 중 특별한 점은 서품 후, 3년 간 큐레이트라는 일종의 보좌사제 기간 동안 다양한 실천적 교육 시스템이다. 보좌사제 본인은 물론 관할사제도 보좌사세가 앞으로 사목을 잘 하도록 함께 사목 보고서 작성 및 실천과정에 참여해야 하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보좌사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보좌사제와 관할사제를 모두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의 사목적 역량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고 본다.

이상 짧은 일정동안 피터버러 교구에서 배우고 느낀 것을 간략히 소개했다. 존 보좌주교의 표현에 의하면, 피터버러 교구의 가장 큰 장점은 교구장 도널드 주교라고 하는데, 이 기간동안 본 주교님의 열정이 참 인상적이었다. 동시에 두 분 주교님의 사목적 고민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피터버러 교구 소속으로 있는 김병준 사제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인생의 바닥에서 일어난 반전(反轉)들

가해 연중 14주 월요일(20170710)

창세28:10-22 / 마태9:18-26images

인생의 바닥에서 일어난 반전(反轉)들

일년이 春夏秋冬 사계절로 이루어지듯이, 우리 인간도 어린이-청년-장년-노년이라는 4계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육신 뿐만 아니라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변화의 폭이 그리 크지 않은 비교 적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 폭이 참으로 드라마틱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 식구, 나와 친한 사람들이 되도록이면 덜 고생하고 비교적 기복이 적은 안정되고 평온한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런 바램과는 달리 인생의 길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인생의 바닥을 맛보며 절망하기도 하고, 다시 일어설 희망과 용기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극적인 반전을 한 4명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 복음에서 회당장과 죽은 그의 딸, 그리고 오랫동안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가장 어려운 인생의 밑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난 반전 이야기입니다.

먼저, 야곱입니다. 오늘날은 많이 약해졌지만, 예전에는 큰 아들에 대한 우선권은 대단했습니다. 더욱이 고대에는 장자의 경우, 모든 집안의 재산과 권리를 승계하는 막강한 부와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여인을 사랑한 큰 아들 에사오를 어머니 리브가가 보기에 영 탐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야곱에게 가문의 정통성을 잇게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나 에사오는 분노했고, 동생 야곱은 형의 노여움을 피해 무작정 도망쳐야 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뿌리가 뽑힌 사람이고, 아무나 그를 해쳐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짐승과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버림받은 야곱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꿈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의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의 이사악의 하느님이다(창세 28,13)”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서 뿌리 뽑혀 나간 야곱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새롭게 이어 주십니다. 야곱의 조상들이 섬겨왔던 하느님께서 직접 그를 복권 시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야곱의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 주고 생명의 근거가 되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추방선고를 뒤집으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반전 선언입니다.

다음으로 복음을 봅시다. 하혈병을 12년이나 앓았다는 것은 당시 수명이 60년이라고 했을 때, 인생의 1/5을 병 중에 시달렸다는 의미입니다. 그 긴 세월 중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녀에게 예수님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슬쩍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 9:22)” 오랜 병으로 심신이 망가진 그녀는 주님의 이 한 말씀으로 영육이 회복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당장과 그의 딸을 봅시다. 예수님이 도착하자 딸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대단하시다 한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장난 속에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자 소녀는 곧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놀라운 반전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사실 우리의 삶도 성서의 인물들처럼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병으로 앓기도 하고, 여러가지 스트레스로 마음과 영혼이 지쳐 있기도 합니다. 참으로 막막하고, 힘들고, 죽을 것만 갔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 옆에 있다는 것을 믿고, 의지합시다. 주님은 야곱처럼 우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때 오셔서 꿈과 희망을 주시고, 다시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혈병 앓는 여인처럼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는 힘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제 다 끝났어”라는 절망의 한 가운데 있더라도 주님은 다가 오셔서 우리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요, 이것의 인생을 사는 반전의 맛일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야곱처럼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창세 28:16)”하고 깨닫는 감탄사를 연발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이러한 주님의 은총을 깨닫고, 주님께 감사 드리고, 나아가 우리도 주님을 닮아서 불안과 낙담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 주님의 사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头 进一步)

bee73b9ae7b7317e226cb530e55083b1-640x435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자가 스승만해지고 종이 주인만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집 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블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느냐?”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어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서ㅔ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한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업ㅎㅅ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르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 10:24-39)

진리를 증언할 때 종종 손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 손해가 어떤 것인지 호되게 겪어 본 지라, 예수님의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이 날이 갈수록 두렵고 떨립니다. 마치 백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머리를 들고서 한 발 더 내밀기가 힘든 것과 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가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어렵고 힘듭니다. 차라리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일터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저 하나 입을 닫고, 눈 감고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평화가 아니기에 제 마음은 오늘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백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에 매달려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고 있는 제 모습을 봅니다.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주님! 저에게 용기를 주십시오. 일상에서 당신의 진리를 증언하고 실천할 때,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도록 저와 함께 해 주십시오.

오늘의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의 기도: “당신의 은총으로 제 십자가의 무게를 능히 감당케 하소서.”

성서묵상: 헤어짐과 기다림(승천일)

images헤어짐과 기다림

오늘은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늘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다가 제자들과 헤어지시는 모습에 눈길이 갔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예루살렘까지 동고동락한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대화합니다. 고진감래 끝에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영화의 한 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고 먼 길을 떠나시고, 제자들은 새로운 기대를 안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두번째 영화 시리즈 개봉을 기다리듯이 말입니다.

우리 가족은 기러기 가족입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공항에서 가족과 헤어지면서 한동안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적하기도 하지만, 다시 만날 거라는 기대에 슬픔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가족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헤어짐을 묵상하면서 우리네 삶 속에 헤어짐과 기다림을 생각합니다.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으로 승화될 수 있는 나날이 되도록 기도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 당신이 제 맘 속에 다시 오시길 기다립니다.”

성령: 선교적 영성의 원천(부활6주 월요일)

thessaloniki31부활6주 월요일

(사도 16:11-15 / 요한 15:26-16:4)

성령: 선교적 영성의 원천

여러분은 기도 중에 환시나 환상, 영상 혹은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있었다면 어떠한 상황 하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나요?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행전은 바울 일행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첫번째 선교열매인 옷감장수 리디아와 그의 가족에게 예수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앞 대목은 바울의 선교 아니 기독교 선교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아시아 지역, 지금으로 말하자면 터키의 소아시아 지역 선교가 난관에 봉착하자 기도 중에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환시를 본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영상’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영어성경에는 ‘vision’, 중국어 성경에는 ‘异象’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기도 중에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啓示(Revelation)’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에는 크게 3차례에 걸쳐 성령의 계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세찬 바람소리와 불 모양으로 내려오셨고(사도 2장 참조), 두번째는 이방인 고르넬리오와 사도 베드로에게 기도 중에 각각 환시를 보여주시며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으며(사도 9장 참조), 세번째는 바울일행에게 유럽으로 건너오라는 환시를 보여 주셔서 유럽선교의 첫 문이 열리게 된 것(사도 16장 참조)입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선교의 고비고비마다 비전을 보여주시며 새로운 길로 안내해 주셨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협조자이신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협조자 성령은 우리를 당신의 증인이 되도록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해 주실 거라고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성령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선교의 원천이자, 영성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의 기도와 선교적 활동은 하나가 됩니다. 이제 기도는 더 이상 기도에서 멈추질 않고, 선교적 활동으로 연결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선교적 활동도 방향을 잃고서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로 올바른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 기도와 선교를 연결시켜 주시는 성령의 활동은 예수님과 사도행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선교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션(Mission)’이란 영화와 그 주제곡에 가사를 실은 노래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선교사들은 기도 중에 환상(Fantasia)을 보고 그 환상을 ‘축소지(Reduction)’라는 이상적 선교 공동체 마을로 실현시켰습니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있는 축소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인류유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교사들의 꿈과 열정이 담겨있는 선교유산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령은 기도 중에 비전과 환상으로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를 ‘하느님 선교(Missio Dei)’의 일꾼으로 불러 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부르심(Calling)에 응답합니다. 성령은 베드로와 고르넬리오를 부르셔서 만나게 해 주시고, 사도 바울을 부르셔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깊고 푸른 바다를 건너 유럽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대서양을 건너 남미의 원주민들이 이상적 선교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성령의 Calling, 성령의 Vision, 성령의 Fantasia를 불어넣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3가지 요소가 서로 결합되어 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3가지 요소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상황입니다. 오늘 들은 독서를 보면 바울일행이 계획했던 소아시아 선교가 가로막히게 됩니다. 또한 ‘미션’이란 영화의 배경을 보면, 종교개혁으로 유럽이 혼란에 빠지면서 교회의 선교정신이 퇴색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측과 행동이 벽에 부딪혔을 때를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오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내려놓고 성령께 마음을 열고 길을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선교사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비전을, 판타지아를 봤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실천과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이 리디아를, 선교사들이 남미 원주민들에 기쁜소식을 전하면서 교회라는 열매가 맺어집니다.

제 개인 삶을 되돌이켜 볼 때, 성령께서는 제가 가려는 길이 막히고 기도 중에 그 길을 물을 때, 비전을 보여주시고 실행할 수 있는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결실을 맺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그러한 것을 체험하셨다면, 주님께 감사 드리고 찬양을 드리십시오. 그러나 아직 체험하지 못하셨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늘 여러분 곁에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기만 하다면 그것은 들려지고, 보여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지금까지 해오던 우리의 패턴을 잠시 내려놓고 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하면, 성령께서는 새로운 비전, 새로운 판타지아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에 응답하고 실행한다면 바울이 유럽선교에 첫발을 딛고, 선교사들이 남미선교에 첫발을 디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새로운 선교지평이 열릴 것을 믿고 희망합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이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에 새로운 비전, 새로운 판타지아를 보여 주시길 희망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자, 일어나 가자(부활5주 화요일)

13ddac3275850c36c7185f38705f1c67부활5주 화요일

(사도14:19-28 / 요한 14:27-31)

 

자, 일어나 가자!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운동경기에 종종 듣는 중국 국가 멜로디 기억나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지내서 그런지 중국 국가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이 노래는 ‘의용군 행진곡(义勇军进行曲)’으로 1935년 만들어진 곡이며 영화 ‘풍운아녀(风云儿女)’의 주제가였습니다. 이 노래 가사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起来起来! 起来!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我们万众一心           우리 모두 일치단결하여

冒着敌人的炮火       적의 포화를 뚫고

前进                         전진하자

冒着敌人的炮火       적의 포화를 뚫고

前进 前进 前进 进。전진 전진 전진 전진하자.

 

아시다시피 당시 중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날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마지막 말씀을 하시는 내용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평화와 차원이 다른 참 평화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의 권력자도 당신을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성부 하느님이 명하신 이 평화를 반드시 알리고 실천하실 거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 “자, 일어나 가자”(14:31)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에는 “자, 일어나 가자!”, 영어성경에는 “Rise, let us go from here.”, 중국어성경에는 “起来,我们走吧!”라고 되어 있는데, 그 중 저에겐 중국어 성경의 표현이 더 비장하고 결연한 느낌으로 와 닿았습니다. 제자들에게 “자, 일어나 가자”라고 하시는 30대 초반의 나사렛 청년 예수의 목소리에서 젊은 의용군들이 적의 포탄을 뚫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그런 용맹스러운 모습과 겹쳐져서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자, 일어나 가자!”라는 청년 예수의 음성은 2000년이 넘게 시대를 관통해 오며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무수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그칠 줄 모르는 예수운동의 원동력이 되는 힘찬 전진의 음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들은 사도 바울의 활동은 그러한 예수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쳐 성 밖으로 끌어냈지만 깨어나서 다시 예수를 증언하러 여러 도시로 전진하고 또 전진했습니다. 그와 바르나바는 각 도시를 돌며 교회를 조직하고 지도자들을 뽑아 세우며 기도와 격려를 중단없이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운동의 활력으로 거대한 세상의 힘인 로마제국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고, 마침내 “세상을 이겼다”(16:33)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참된 평화를 설파하시며 “자, 일어나 가자!”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오늘 우리나라, 우리 교회, 우리 각자에게도 다음과 같이 이 말씀을 외치고 계십니다: “자, 일어나 가자, 한국인들이여!”, “자, 일어나 가자, 나의 교회여!”, “자, 일어나 가자, 나의 사랑하는 벗들이여!”. 이제 나사렛 청년 예수의 힘찬 부르심에 우리모두 “예”하고 응답합시다. 그리고 걱정과 두려움을 떨쳐 내고 벌떡 일어나 청년 예수와 함께 전진합시다.

“자, 일어나 가자!”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일어나서 전진할 수 있도록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감각적 신앙(루가24:35-48)

untitled4월 20일 설교문

사도3:11-26 / 시편 8 / 루가24:35-48

감각적 신앙

그리스도교 영성에는 여러가지 기도방식이 있는데 그 중 ‘관상(contemplation)’이란 기도방법이 있습니다. 이 관상기도에는 크게 두 가지 기도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치 선(禪)불교처럼 무념무상을 목표로 자신을 비워 나가 하느님의 신비에 도달하는 관상 전통인데, 흔히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관상 전통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St. Ignatius of Loyola)이 저술한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은 상상력을 활용하는 기도훈련을 가장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입니다. 이러한 상상력을 동원한 관상 중에 ‘오감묵상(五感默想)’이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다섯가지 감각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사용하여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고 그 분과 더욱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을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오감묵상을 활용하여 예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훌륭한 기도 소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놀랍고 무서워서 안절부절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만져 보아라.”하시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고 합니다. (24:37-43 참조)

우리는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순 없지만, 관상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상력을 통하여 특별히, 오감을 활용하여 예수님의 손과 발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만지고’, 그 분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잡수시는 구운 생선 냄새를 ‘맡고’, 그 분과 함께 생선을 먹으면서 그 맛을 ‘음미’해 봅니다. 이러한 관상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내가 시간을 초월하여 예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은총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나에게도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어 봅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24:45) 당신의 구원 신비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마침내 복음의 증인으로 파견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이러한 관상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성경 속 문자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내 영혼 심지어 내 오감을 통해 내 몸에까지 스며듭니다. 그리하여 나 역시 그분의 제자가 되고, 그분의 사도가 됩니다. 이처럼 관상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하고, 하느님과 나를 더욱 인격적 관계로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기도가 주는 신앙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비록 예수님 시대 사람들처럼 그 분을 감각적으로 접할 순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관상 속에 오감으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함께 먹고, 만질’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활자 안에 갇힌 존재, 우리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추리되고, 생각되고 심지어 연구되는 존재가 아니라 생생하게 감각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되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토마사도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기까지 우리는 참으로 많은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교회의 전례와 성사를 통해서, 사제들의 설교와 신자들의 신앙간증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조금씩 그분을 알아갑니다. 오늘 제가 소개한 감각적 관상 역시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시는 여정에 좋은 영적 길잡이가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 주님과 당신 만이 만날 수 있는 공간에서 관상할 때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시고, 당신의 소리를 들으시며, 당신의 체취를 맡으시고, 당신을 어루만지시며, 마침내 당신과 함께 생명의 양식을 맛보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뜻밖의 진실과 만났을 때(마태 28: 8-15)

th4월 17일 부활 후 월요일

(사도 2:14, 22-32 / 마태 28: 8-15)

뜻밖의 진실과 만났을 때

사서오경 중 하나인 대학(大学)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视而不见,听而不闻,食而不知其味)” 이것은 마음이 없으면 모두 스쳐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있으면 스쳐가는 것도 내 것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들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또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여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경비병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들과 닿아 있었습니다. 여인들과 경비병들 모두 천사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반응과 이후의 대처방식은 완전히 상반됩니다.

먼저, 여인들을 봅시다. 오늘 복음 앞부분에는 빈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천사가 나타납니다. 복음저자는 여인들이 이 광경을 보고, 또 천사들의 메시지를 듣고서 “무서우면서도 기뻤다”(28:8)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목도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은 무서움입니다. 가령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죽었다고 알고있는 사람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대신에 유령 같은 천사가 나타나 “그 사람은 살아있다”고 할 때, 놀라고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기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인들은 두려움과 기쁨이 혼재된 상태에서 무덤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뜻밖의 진실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가오시며 “평안하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예수님의 두 발을 붙잡고 엎드려 절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의 몸을 만지면서 그들은 두려움보다 기쁨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28:1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겁 많고 나약하고 그래서 배신하고 도망친 제자들을 “형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도적으로 인간세상에 오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망친 나약한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오십니다. 그것도 우리를 당신의 벗이요, 형제로서 올려 주시면서 말입니다.

다음으로 경비병들을 봅시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 형벌로 처형당한 사형수에 불과합니다. 다만,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경비를 서는 임무를 맡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인간의 경험세계로 상상할 수 없는 뜻밖의 진실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에 대해 자신들을 고용한 성전의 대사제들에게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대사제들은 돈을 쥐어 주며 진실을 거짓으로 조작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라는 존재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진실보다 돈을 위해서 기꺼이 거짓의 편에 가담합니다. 설교 도입부에 인용했던 대학의 구절,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경비병들과 대사제들에게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한 예수와 함께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기회!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론 제자들처럼 나약해서 진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외면 받을 때, 용기 있게 진리 편에 서지 못하고 슬그머니 침묵을 지키거나 심지어 도망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론 진리의 소리가 남아있어 예수님의 시신을 모신 무덤 언저리를 맴돌았던 여인처럼 마음 한 편에 남겨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먼저 다가오시며, “내 형제여, 내 벗이여, 평안하냐?”하고 말씀을 건네십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고 그러시기에 먼저 오셔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벗이요, 형제로 불러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겨자씨만한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오시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